♣ 詩그리고詩/한국명시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시인 최주식 2011. 11. 10. 22:17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끝을 날카롭게 구부리고 지붕 위를 떠 가는 초승달  
왜 입 안에 신 침이 고이는 것일까

 

껍질 반쯤 벗겨진 사이로
신물 주르륵 흘러내리고 노란 껍질
익다 못해 터진 그 사이로 안개처럼 떠 있는

 

앞에는 키작은 아이들 뒤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100년전 사람들
단장을 짚고 안경을 쓰고 줄줄이 서있던 일족의 흑백사진
한 잎 배를 타고 칠흑의 밤을 노저어 가던 그집

 

그 집 벽 위 액자에도 저런 빛깔의 과일이 한 쪽 떠 있었던 것만 같다
먹어본 듯하나 아직 먹어보지 못한  

 

주르륵 지붕 위로 미끄러져내리던

 

100년도 전에 그집 사람들 미끄러져 가면서
남자가 입덧 중인 여자에게 
열매를 까서 한쪽씩 입에 넣어주고
아기들에게도 쪼개주고
둘러앉아 한쪽 눈을 찌그리며 터뜨려 먹고 있는데

 

그 때 밀감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신 살구빛의
그것이  먹고 싶어
어미의 갈비뼈 밑으로 기어 들어간 그 기억 때문일까

 

깜깜한 밤하늘 뚫고 신 살구빛의 새초롬한 달
신물 터져나오면 한 쪽 눈이 찌그러지다 환해지는데
 
그 집 액자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밤 배 탄 사람들
아직도 기린처럼
그 열매 끌어내려 터뜨려 먹으며 가고 있는지

 

잔뜩 구부리고 초승달 미끄러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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