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우주적 우연 / 이운진

시인 최주식 2011. 12. 29. 22:34

우주적 우연 / 이운진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그대가 만약 그라면

나는 지구의 속도로 걸어가겠어

시속 1674km의 걸음걸이에 신발은 자주 낡겠지만

지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사랑을 믿는

이 별의 아름다운 관습처럼 살고 싶어서였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단단한 국경선인 마음을 넘어

천 년 넘은 기둥처럼

그의 곁에 조용히 뒤꿈치를 내려놓는 일이야

 

눈부신 밤하늘의 정거장들을 지나

지구라는 플랫폼으로 그가 오면

풀잎이 새에게

호수가 안개에게

바위가 바람에게 했던 긴 애무를

맨발로 해 주겠어

첫 꿈을 깬 그대에게 적막이 필요하다면

돌의 침묵을 녹여

꽃잎 위에 집 한 채를 지어주겠어

그것으로 나의 정처를 삼고

한 사람과 오래오래 살아본 뒤에도

이름을 훼손하지 않겠어

지구에서의 전생前生을 잊지 않겠어

 

-『시인시각』(2011년 가을호)

'♣ 詩그리고詩 > 1,000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을 심었다/윤제림   (0) 2012.02.21
가을이 아름다운 건/이해인  (0) 2012.02.20
나는 가고 나만 / 한미영  (0) 2011.12.29
어머니의 밥상 / 우옥자  (0) 2011.12.29
담쟁이 / 정미경  (0) 2011.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