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나는 가고 나만 / 한미영

시인 최주식 2011. 12. 29. 22:33

나는 가고 나만 / 한미영


럭셔리한 호텔 커피숍
젊고 세련된 남자 바리스타
흰 와이셔츠에 단정하게 앞치마 두르고
루왁커피 한 잔 내어민다
사향고양이 뱃속에서 익힌 커피 알맹이
그 배설물로 만든다는 똥커피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
봉지담배를 쟁여 곰방대 피우실라치면
팔각성냥통에서 얼른 성냥개비 꺼내
불 그어 대는 나를 보고
똥도 버릴 게 없는 내 강아지
똥도 버릴 게 없는 내 강아지
우쭐해진 나는 부상으로 받은 성냥 한 통 끌어안고
성냥개비 끝에 발린
커피 향처럼 후각을 쏘던 빨간 유황을
싫증나도록 빨아먹었다
허연 막대기만 남은 성냥개비를
배설물처럼 깔고 앉아서 이담에 당연히
똥도 버릴 게 없는 어른이 될 거라 믿었다
이제
맛도 모르고도 맛있게 유황 먹던 그때처럼
지나치게 숭고한 루왁커피 한 잔 마시며
똥도 버릴 게 없다던 나는 어디
남의 똥을 마시고 앉은
세련된 나만 남았다

 

《시산맥》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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