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가정식 백반/윤제림

시인 최주식 2012. 3. 23. 22:42

가정식 백반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윤제림(1960~ )

아직 추위가 가지 않은 새벽, 사내들이 밀어닥친다. 봄처럼 밀어닥친 사내들. 무엇에도 구애받길 거부하며 자라난 사내들. 요것조것 따지며 살고 싶지 않은 사내들. 그들의 뼛속엔 노모의 근심도, 어린 아이들의 애잔한 칭얼거림도 박혀 있겠으나 근육에는 생명이 번쩍인다.

아침밥 먹기 전에 무슨 일들을 하고 왔을까? 집을 짓는 사람들일까? 길을 닦는 사람들일까? 암튼 이 생명력 넘치는 허름한 식당이 그 어떤 새벽 예배당보다 성스럽다. 그 어떤 기도회보다 하나님과 가깝다. 권위가 아닌 생명으로 충만한 이 젊은 아버지들에게 유식한 논란은 필요치 않다. 다만 일이 있어 즐겁고 일이 있어 아름답다. 세상이 이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푸다 만 듯한 밥공기를 내밀어서는 안 된다. 세상이 이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

이들의 기도는 심플하고 간절하다. '밥 좀 많이 퍼요.' 자연스레 백반집 주인은 김 무럭무럭 나는 흰 쌀밥을 퍼주고는 이날 아침 높은 하나님이 되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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