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모닥불/백석

시인 최주식 2012. 5. 9. 22:46

모닥불/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백석(1912~1996)

세 개의 원이 있다. 맨 안쪽의 조그만 원에서는 이제 목숨 다한, 온갖 값없는 것들이 조용히 타고 있다. 부스럭거리는 불의 소리들이 할딱이는 듯하다. 활활 탈 수 없는 사연을 가진 땔감들이다. 가난한 냄새도 조용히 올라온다. 개터럭에 기왓장까지도 함께 들어 있으니 차별하고 구별하지 않은 무기물의 세계다.

그 둘레에 또 하나의 원이 있다. 여기는 목숨들의 원이다. 큰 개도 강아지도, 땜장이도 당숙도 더부살이도 주인도 두 손 모으고 서 있다. 역시 아무런 차별이 없는, 오직 따뜻함만을 고루 나누자는 목숨들의 원이다.

그 바깥에 또 하나의 원이 있으니 이 모닥불을 길러온 시간의 원이다.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동상에 걸린, 모닥불 하나 쬘 수 없어 몽당발이 된 콧등 시린 내력이 조용히 둘러서 있다. 선거 지난 지금, 너나없이 누구나 다가가 쬘 수 있는 화평한 모닥불이 하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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