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국경/이용악

시인 최주식 2012. 5. 31. 23:15

국경/이용악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하늘은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다 얼어죽은 산토끼처럼 지붕은 말이 없고 모진 바람이 굴뚝을 싸고돈다 강 건너 소문이 그 사람보다도 기대려지는 오늘 폭탄을 품은 젊은 사상이 피에로의 비가에 숨어 와서 유령처럼 나타날 것 같고 눈 우에 크다아란 발자옥을 또렷이 남겨 줄 것 같다 오늘

―이용악(1914~1971)

나는 통일이 되면 두만강 가에 주막을 차릴 거야. 눈보라 뚫고 오는 손님들을 맞을 거야. 같이 대작(對酌)을 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싯푸른 낭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데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 희박하나 국경을 모르고 자란, 나라 전체가 국경인 불운한 나라에서 낭만이 결핍된 시절을 보낸 우리들에게 국경은 일종의 잃어버린, 동경의 가상공간이었다.

'눈송이를 낳은 뒤 은어의 향수처럼 푸른' 이 아름답고 이국적인 하늘은 과연 어느 나라의 하늘이었단 말인가. 저 북쪽의 정서가 우리 문학에서 사라진 지 오래, '얼어죽은 산토끼' 같은 '지붕'의 비유가 불가능한 시대, 폭탄 같은 사상까지도 그리운 시대다. 우리들은 왜 이리 조무래기들이 되어간단 말인가. 학급 석차와 아파트 평수와 당뇨병이나 염려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눈 우에 크다아란 발자옥을 또렷이 남겨 줄' 사람을 기다린다. 너무 빨리 온 이 눅눅한 여름 날씨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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