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황혼/이광덕

시인 최주식 2012. 5. 31. 23:20

황혼 뒤에 작은 달은 떨어지고
푸득푸득 새는 날아 산 빛 속에 숨어든다.
대청 앞의 늙은 파수꾼은 휘늘어진 나무
성곽 넘어 고매한 어른은 우뚝 높은 산
경박한 세상이라 뼈만 앙상한 몸을 멀리하고
흐르는 세월은 젊은 얼굴을 앗아간다.
나는 너와 은총과 원한을 다투지 않건만
무슨 일로 벌레처럼 헐뜯으려 덤비는가?

拍拍禽投翠靄間(박박금투취애간)
廳前老守波娑樹(청정노수파사수)
笏外高人偃蹇山(홀외고인언건산)
薄俗已嫌疎骨軆(박속이혐소골체)
流光漸奪少容顔(유광점탈소용안)
我非與汝爭恩怨(아비여여쟁은원)
何事怵虫復欲訕(하사출충부욕산)

―이광덕(李匡德·1690~1748)

황혼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라.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영조 때 대제학을 역임한 문신(文臣)이었던 시인은 어느 날 황혼 무렵 마루에 가만히 앉았다. 어둠이 차츰 밀려오고 새들도 자러 드는 시간, 대청 앞의 큰 나무는 나이 든 파수꾼처럼 의젓하고, 성곽 넘어 높게 솟은 산은 고매한 어른인 양 당당하다.

그가 상념에 잠긴 이유는 무엇일까? 경박한 세상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늙은이를 무시하고, 세월은 젊고 팽팽한 피부를 빼앗아 버렸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아직도 욕만 얻어먹고 산다. 인생의 황혼에는 허전함과 억울함이 찾아들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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