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새끼
빨랫줄 잡고 할머니 변소 가네요
땅을 비집고 올라온 느릅나무 뿌리처럼
돌아간 왼쪽 발목 왼쪽 손목은
자꾸만 못 간다, 못 간다, 하는데도
할머니 손에 빨래집게 하나, 둘, 셋, 넷……
계속해서 밀려가고 영차영차
할머니 변소에 막 당도했네요
때려치운 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처럼
매미들이 지겹게 우네요
말벌 한 마리 슬레이트 변소 지붕 끝을 툭
툭 건드리고 있네요
이놈아, 변소간 천장에 매달아놓은 줄
또 라이터로 지졌냐!
할머니 변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씨부랄 새끼, 한 말씀 하시네
―신기섭(1979~2005)
시(詩)가 고상한 말씀들의 성전(聖殿)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조금만 맞는 생각이다. 사람의 생(生)이 그렇게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많지만 그것도 아주 조금만 맞는 말이다. 인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여기 있으니 손주 하나와 병든 할머니가 슬레이트 화장실이 마당 건너에 딸린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맞는가? 견디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악취 나는 변소에서 손자는 왜 천장에 매달아놓은 줄을 매번 지졌을까? 그렇게 울었던 것이다. 이 소년, 어찌하여 일 년 동안만 시인으로 살다 갔을까. 나는 시무룩하다.
'가슴으로 읽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혹/황지우 (0) | 2012.08.10 |
---|---|
감회가 있어/이덕무 (0) | 2012.08.10 |
낙타/손동연 (0) | 2012.08.10 |
비/서숙희 (0) | 2012.07.11 |
우물 치는 날/정인섭 (0) | 2012.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