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송(頌)
환히 웃었지만
곁에 설
머슴애 있니?
사위듯 피는 꼴이
제참에도 사뭇 수줍어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먹빛 티로
남는다.
긴 비[雨]에 지치면
말인들 뛸까만
여름이 지루해서
산도 제자리채 녹네
슬며시 감기는 빛살
문득 신선한
이마여.
―한분순(1943~ )
- 이철원
시골집 꽃밭에는 여름 손님이 특히 많았다. 분꽃, 깨꽃,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등 나직하고 소박해서 더 정겨운 손님들로 뒤란은 여름마다 붐볐다. 그중 반갑고도 귀찮은 부름 같은 게 있었으니 바로 분꽃의 개화(開花)다. 나직한 가지마다 방긋방긋 피워든 꽃은 다름 아닌 저녁밥 지으라는 귀띔! 해가 설핏해지면서 피기 시작하는 분꽃은 앙증맞은 나발을 여름내 그렇게 불어주었다.
곁에 설 머슴애가 없어도 분꽃은 한결같이 피고 졌다. 먹빛 티 같은 씨앗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일 게다. 산조차 제자리에서 녹을 정도로 지루한 여름이건만, 분꽃은 해마다 소임을 다해 저녁을 피웠다. 그럴 즈음 꽃밭 옆 장독대에는 먹다 남은 수제비가 별빛을 받으며 식어가곤 했다. 분꽃이 피면 저녁 지으러 총총 가던 동네 언니들과 옥수수와 별이 익어가던 그 여름의 멍석으로 긴 밤마실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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