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여름밤/유득공

시인 최주식 2012. 9. 10. 22:05

여름밤/유득공

 

개구리도 맹꽁이도 풀섶에서 잠잠하고
달 밝은 뜨락에는 홑옷을 다리는데
하늘에서 이슬 내려 이렇듯이 시원할 때
희디흰 봉숭아꽃 함초롬히 젖어 있네

날 저물자 박쥐란 놈 헛간을 돌아 날고
비 그쳐 젖은 뜰을 두꺼비 이사 가네
담 모퉁이 무너져서 달빛은 쏟아지고
박꽃은 새하얗게 가지런히 피어 있네

夏夜(하야)

와민성침약초비(蛙黽聲沈藥草肥)
월정시견위단의(月庭時見熨單衣)
일천노기양여허(一天露氣凉如許)
백봉선화습불비(白鳳仙花濕不肥)
혼비편복요허청(昏飛蝙蝠遶虛廳)
청사섬서과습정(晴徙蟾蜍過濕庭)
파패장변다월색(破敗墻邊多月色)
포화제발소정정(匏花齊發素亭亭)

―유득공(柳得恭·1748~1807)

'발해고'의 저자로 유명한 실학자 유득공의 시다. 혹독한 더위가 물러가고 조금씩 찬바람이 불어오는 무렵의 여름밤 풍경이다. 농촌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울 사대문 안에 있던 시인의 집 풍경이다. 한낮의 더위가 물러나고 어둠이 몰려온 뜰에 서면 시인의 감각은 생기를 회복한다. 한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개구리 맹꽁이 박쥐 두꺼비가 반갑고 달빛 스며든 뜨락에서 다리미질하는 아내의 모습도 새삼 정겹다. 그러나 화단 한쪽에서 이슬에 젖은 채 하얗게 피어 있는 봉숭아꽃과 달빛 아래 담장 위에 나란히 피어 있는 하얀 박꽃만 할까?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글로 옮겨놓았을 뿐인데 그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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