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가을 햇볕/고운기

시인 최주식 2012. 11. 25. 22:15

가을 햇볕/고운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하다.

―고운기(1961~  )

가을은 투명의 계절이다. 하늘이 그렇고 강물이 그렇다. 산은 겨울을 나기 위해 머금었던 물을 모두 내보낸다. 산의 정수를 모은 계곡의 소(沼)를 들여다보라. 그 어떤 경전보다 깊은 사색의 문장들이다. 그 곁에 앉아 있는 것은 모든 생각하는 이들의 초상(肖像)이 아닐는지. 엎드린 자세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가 공연한 그림이겠나. 게다가 바람이 불면 밀려오는 물비늘의 유연한 주름과 반짝임은 사랑이 싹틀 때의 그것이다.

사랑이 막 싹트는 여고 2학년, 열여덟 살. 그네들의 걸음걸이에 가을볕이 쨍그랑거리며 부서져 내린다. 그네들의 풋대추 같은 얼굴은 보기만 해도 해맑아 고개를 더 들어 시선을 하늘로 보내버린다. 막 싹튼 사랑의 마음은 처음 생겨난 것이므로 '생살'이다. 생살의 사랑으로, 말하자면 '처음처럼' 일생 살고 싶었건만…. 문득 목덜미가 선선해진 기운의 바람 속에 야무지게 내리쬐는, 그래서 모든 생명의 씨앗을 여물게 하는 햇볕의 손을 잡아본다. "참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