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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이반의 대서사시에서 자유·구원 읽는다

시인 최주식 2012. 11. 26. 23:28

 

[두번째 작품은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삶은 古典입니다]

김연수가 읽은 '까라마조프'
친부 살해의 모티프 - 햄릿·오이디푸스 뛰어넘어
인류가 절멸하지 않은 이유 - 용서와 타인 죄 짊어지는 것

김연수 소설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서울에서 부산에 가자면, 대전을 거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최단거리를 지나갈 테니까 말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의 세계다. 양자론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 양자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확률의 문제다.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부산을 갈 확률은 아주 높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확률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그에 반해서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청진을 지나 부산까지 이르는 확률은 0에 수렴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0은 아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나긴 소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출발지점은 바로 여기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높은 확률을 따라, 그러니까 주어진 길을 따라 상식적으로 움직인다. 이 딜레마는 인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인간에게는 모든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왜 두 적대 세력은 지금 당장 무기를 내려놓을 자유가 아니라 더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혼돈을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렸겠지만, 이 질문에 답할 사람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20세기인들일 듯하다.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이런 줄거리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됐다. 까라마조프의 세 아들 중에서 첫째인 드미트리만 나왔다면, 이 소설은 두 번째 '오이디푸스'나 '햄릿'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 이반 덕분에 이 소설은 앞선 두 고전을 뛰어넘는다. 무신론자로서 인간의 지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이반의 존재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을 목전에 둔 19세기 지성인들의 모습을 닮았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줬다면, 우리가 왜 그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

이반의 질주가 문학적으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부분은 너무나도 유명한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심문관' 편이다. 16세기 재림한 예수와 종교재판소의 대심문관 사이의 대화를 담은 이 부분을 읽고 나면 성과 속, 권력과 영광, 인간의 의지와 신의 뜻, 자유와 굴종에 대한 그 어떤 글을 읽어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심문관' 편은 오리지널 중의 오리지널이다. '대심문관' 편을 읽은 뒤, 두 개의 질문을 겹쳐볼 수 있다. 인간에게 화해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살육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면 우리가 왜 살육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할 수 없단 말인가. 그게 바로 신의 뜻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인류 문명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화해해야만 하는 복종이 아니라 살육할 수 있는 자유에. 살육과 파괴를 인간의 본원적인 악과 연결시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상식을 뛰어넘는다. 인간의 자유에는 목적이 있을까? 이건 역설이다.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게 어떻게 자유일 수 있을까? 살육할 수 있는 자유가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된다면, 이 말 역시 역설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 알료샤를 통해 그는 이 질문의 해답을 구한다.

자유는 죄를 낳고, 그 죄는 벌을 낳는다. 이건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부산에 이른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런데 죄의 단계에서 놀라운 가능성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나의 가능성은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 인류 문명의 기초가 여기에 있다는 건 바로 이 두 개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간 수많은 살육 행위와 보복 행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절멸하지 않고 21세기까지 이른 이유 역시 바로 이 두 개의 가능성 때문이다.

이 가능성은 오직 행동으로만 드러난다. '대심문관' 편에서 예수는 아무런 말 없이 대심문관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맞춤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한다. 용서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는 적의 입술에 입맞추는 행위다. 심장에는 비수를, 하지만 입술에는 키스를. 그 역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구원받았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그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언이다. 그래서 인간은 파괴하는 자유를 선택한다. 그것도 그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인간은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 인류는 이 세 개의 명제를 밟고 서 있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140자 트윗 독후감]

"형제들은 구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회는 아예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으며, 기다림에 지친 그들의 의식은 점차 침체하여 감각의 마비가 퍼져가고 있었을 때, 기적처럼 그들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아이디 sonicmi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