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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다윈, 자연의 퍼즐을 맞춘 5년의 탐험

시인 최주식 2012. 11. 30. 22:29

최재천 교수가 본 '비글호'
목사가 꿈인 청년, 생물학자로… 남미에서 대부분 시간 보내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글은 발견의 환희대신 담담·차분… 진화론 '종의 기원'의 모태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그저 2년 남짓인 줄 알고 떠난 여행이 거의 5년 가까이 걸렸다. 목사가 되기 전에 한번이라도 열대 구경을 하고 싶다며 떠났는데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생물학자가 되어 돌아왔다. 가문의 수치가 되려느냐는 아버지의 꾸지람을 뒤로하고 떠났는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과학자가 되어 환향했다. 항해 도중 꾸준히 보내온 편지에서 발췌한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됐고, 세계 각지에서 채집해 보낸 어마어마한 양의 표본은 런던 학계에서 이미 주목받는 과학자료가 되어 있었다.

귀국한 지 1년도 채 안 된 1837년 어느 날 다윈은 그의 '노트북 B'에 유명한 나뭇가지 그림을 그린다. 생물종이란 원래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변이가 생기면서 가지가 뻗어나가듯 분화한다는 그의 생각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이듬해 1838년에는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는다. 다윈은 이미 이 무렵 생존경쟁에 의한 자연선택의 얼개를 구상해 두었던 것이다. 조물주 즉 인위적인 선택자(selector)가 없어도 자연은 스스로 적응에 성공한 자들을 선택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내고 그 증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839년 '비글호 항해기'가 출간되고, 다윈은 일약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흔히 '오도릭의 동방기행''왕오천축국전' '이븐 바투타 여행기' 그리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세계 4대 여행기로 꼽는다는데, 선정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비글호 항해기'는 훗날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등 다윈의 주요 저서들에 과학적 증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진화론의 기반을 마련해준 책이다. 최근에 출간된 '오, 이것이 아이디어다'라는 책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적 방법'(8위), '민주주의'(14위), '자본주의'(42위)를 누르고 인간이 고안한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 중 7위에 올라 있다. 영국 사람들은 이제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뉴턴보다 다윈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우리나라에 번역된 '비글호 항해기'는 다윈이 1839년에 출간한 원본을 개정하여 1845년에 다시 출간했다가 '종의 기원'을 내고 난 다음 해인 1860년에 새롭게 각주를 보태 펴낸 책이다. '비글호 항해기'는 다윈을 작가로 '등단'시킨 책이다. 이론서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때로 거의 한 쪽을 넘도록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종의 기원'의 길고 난해한 문장들에 비해 이 책의 글들은 사뭇 경쾌하다.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여행자의 표표한 감정과 더불어 모험적이고 의욕적인 젊은 다윈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책이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비글호가 비록 세계를 일주했다고는 하나 남미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갈라파고스 제도까지 남미 탐사의 일부로 포함한다면 거의 4년의 세월을 보낸 셈이다. 1835년 10월 20일에 갈라파고스를 떠난 다음에는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남태평양, 호주, 인도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온다. 또한 우리가 흔히 진화론의 탄생지로 배운 갈라파고스 제도에 관한 글이 발견의 환희로 가득 차 있기는커녕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다윈이 작성한 현장 노트를 보면 갈라파고스에 대한 부분은 분량 면에서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자연선택 이론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핀치새들이 각각의 섬마다 독특하게 진화한 이른바 적응 방산(adaptive radiation)의 결과라는 사실은 영국에 돌아와 조류학자 존 굴드의 분석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과학의 발견은 때로 이렇게 모든 퍼즐 조각이 다 자리를 잡은 후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부부 생물학자 피터 그랜트(Peter Grant)와 로즈메리 그랜트(Rosemary Grant) 교수는 197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40년 동안 갈라파고스에서 다윈의 핀치를 관찰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로 자연선택 메커니즘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종의 기원'으로의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