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
늦겨울 짚더미에 불이 붙는다. 알맹이 다 털어내고 껍데기만 남은 것들은 타닥타닥 뼈 소리를 내며 재가 되고, 겨울은 그렇게 물끄러미 먼지가 된다. 그을린 소주병 몇 개와 육포 몇 조각이 누군가가 바로 전에 시키지도 않은 자기 변론을 했음을 알려준다. 짚불 앞에서 느끼는 거지만 인생에는 지리멸렬한 요소가 있다. 깔끔하게 털지 못하는 그 무엇. 질척거리는 헛소리 같은 게 있다. 가늘고 긴 인생들에게 불꽃 몇 개가 날아든다. 찬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헛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허연(1966~ )
분명한 것은 추수할 것이 없는 생(生)의 국면이 있다는 것이다. 노력이 부족했다느니 따위의 하기 좋은 소리로 묶을 수 없는 운명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그러할 수도 있고 명예가 그러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생의 허기진 폐허가 비리고도 쓸쓸히 부조(浮彫)되어 있다. 울음도 사치일 것만 같은 음화(陰畵)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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