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시인의 집, 시 속의 집(기사제공: 계간 시인세계)
오늘의 한국 시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에게 시창작의 공간은 과연 몇 평이면 족할까? 시인이 거주하는 삶의 공간(집)이 창작의 공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세계와의 유대와 자기 동일성이 형성되는 실존의 중심공간임은 분명할 것이다.
《시인세계》가 기획특집으로 마련한 <시인의 집, 시 속의 집>은 1500여 명에 달하는 시인들의 거주 현황을 확인 분류해보았다. 또한 고전시가를 포함한 한국시에 나타난 집의 변천과 의미를 살피고, 삶의 거처이자 창작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한 시인들(김영승, 함민복, 최영철, 장석남, 함성호)의 생각을 들어 보았다.
물론 이런 시인 지리지地理志가 시인의 내밀한 상상공간까지 그려내 보이지는 않겠지만, 주거와 창작공간으로서의 집(방)에 대한 시인들의 지리(공간)인식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보게 할 것이다. 아울러 온라인상에 새롭게 지어지기 시작한 시인들의 집(홈페이지, 블로그)도 탐방해 보았다.
가상과 현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된 사회에서의 상상력을 미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얻게 되는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이 새로운 가상의 집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과 시의 지리지地理志>
시인과 시의 지리지地理志
우 대 식
『산해경』을 번역한 정재서 선생은 edward w. said가 말한 상상적 지리(imaginative geography)라는 개념을 빌어와 『산해경』의 표층 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사이드에 의한 상상적 지리 인식이란 자신에게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극화劇化시켜 자기 중심의 사고를 강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지리 인식이 오늘날 가당키나 한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시공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극화시킨다는 점에서 상상적 지리라는 개념은 우리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시인에게 공간의 의미는 무엇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의 의미는 무엇인가?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시인들만큼 공간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자들도 드물다.
더불어 건축에 관한 관심이 전문가의 수준에 이른 시인도 적지 않다. 언젠가 내 손으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시를 쓰겠다는 욕망은 고전적이면서도 미래 지향적인 생의 지표를 보여준다. 그들이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어디에 살면서 상상적 지리 인식을 통해 공간을 무화시키고 극화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시인들이 지닌 공간에 대한 욕망의 지형도를 살피는 일이 될 터이다.
『택리지』야말로 조선 후기 사대부의 공간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저일 터이다. 이중환은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재종손으로 30여 년의 긴 방황을 했던 인물이다. 이 책의 서문과 발문을 보면 당시 사대부들의 지리에 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성호 이익은 아래와 같은 서문을 썼다.
내가 늙어 죽게 되어 담비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둔덕 쪽으로 두는 것처럼, 쥐가 제 구멍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강변 비습한 땅을 떠나지 못해 사대부가 살기 알맞은 곳으로 가지 못하니, 자기 자신을 쓰다듬어 더욱 서글퍼짐을 저절로 깨닫지 못한다.
사대부가 살기 알맞은 곳을 찾아 떠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될 자신에 대한 연민을 이 글은 보여준다. 아마 많은 시인들이 지리地理에 대한 열망과 그 열망의 사그러짐 사이에서 갈등하고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사실 더 딱한 것은 당시 이중환의 처지이다. 목회경은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청화자(필자 주:이중환의 호인 청화산인淸華山人의 준말)는 명문 자제로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올라, 문학과 재략이 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진실로 왕업을 빛나게 하고 국론을 도울 만하였다. 벼슬길 또한 평탄할 것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문장 때문에 운명이 해를 받았음인가. 귀신이 시기하여, 먼 길 가는 수레를 문득 얽매어 죄는 것 같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론과 노론의 정쟁 속에서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유배와 방랑을 거듭하며 평생을 살았던 이중환에게 자신이 이르는 땅은 바로 인심의 척도를 보여주는 기준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시인들도 많은 이동을 보여준다. 자신의 자리에서 그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인문지리에 해당하는 따라서 좀 더 큰 자리에서 다루어야할 과제이다.
이 글은 시인들의 거주지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소략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주요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시인협회의 주소록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공하는 문인수첩을 참고로 시인들의 거주현황을 분류해보았다. 여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일단 주소가 맞지 않는 부분도 여러 군데가 있어 아는 범위 내에서 수정하였다. 시인들 역시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이라 많은 이동이 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직장으로 주소를 명기한 분들도 많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그럴 경우 필자가 분명히 아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직장 주소를 집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동명이인의 경우가 있어 통계에 실수가 있을 수 있음도 밝혀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서 누락된 시인들이다. 즉 두 주소록에 없는 시인들은 통계 대상과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문제까지 염두에 두다 보니 애초에 논의를 진행할 수 없겠다 싶어 오로지 두 주소록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였음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지역 시인 수
서울 547
경기 274
대전 39
충남 38
충북 32
광주 50
전북 51
전남 26
제주 19
인천 37
강원 34
경북 31
경남 102
대구 69
부산 85
합계 1434
거주지 조사 대상 전체 시인은 총 1,50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서울 거주 시인이 547명으로 전체 시인의 약 35%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남, 서초, 송파에 약 100여 명이 거주하고 마포, 영등포, 강서, 양천의 경우도 약 100여 명의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도봉, 성북, 강북, 노원, 서대문, 동대문 등 강북 지역에 가장 많은 시인들의 주소가 산재해 있었다.
지역적으로 면적이 가장 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어쨌든 숫자상으로 서울은 시인들의 공화국인 셈이다. 따라서 일일이 거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장환은 해방 공간에서 병든 서울을 노래했다. 유하는 90년대 초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세속도시의 징후를 적나라하게 풍자함으로써 탁월한 예지력을 보여준 바 있다.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부분).
유하가 이 시를 쓴 지 2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날도 그 심리적 거리가 좁혀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작년에 시집 『곰곰』을 펴낸 안현미는 시구문에서 착란을 꿈꾼다.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屍口門 밖, 봄」 부분).
시인은 어느 날 신당동에서 왕십리로 빠져나가는 시구문에서 푸른 하늘 아래서 모두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다. 서울에서 시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불우의 연주이다. 그들은 현대적 의미의 유목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잠시 딛고 있는 공간을 노래할 때면 벌써 눈이 충혈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에는 약 270여 명의 시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가운데 일산이 40여 명으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인근의 고양, 파주의 시인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안양, 분당, 용인, 안산 등에 20여 명 안짝의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미 타계한 기형도는 시흥 소하리 자신의 집으로 가는 안양천변을 묘사한 시 「안개」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고 쓴 바 있다. 개인적으로 ‘모두들’이라는 시구 앞에서 늘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해 연민을 갖게 되는 것은 내 못된 시 감상법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 일대에 많은 공장 지대들이 산재하고 있는 것은 산업화의 효율성 때문일 것이다.
『다시 쓰는 택리지』에서 신정일은 아래와 같이 일산을 묘사하고 있다.
고양시 일산구는 옛 시절 서울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었으나 일산 토박이들은 그 덕을 보지 못했다. 나라 안에서 실리와 계산이 가장 빠르다고 소문난 개성과 서울 상인들 때문이었다. 그 때 떠돈 말이 ‘실속 없는 일산 사람들’이었고, 일산 사람들은 두 도시 사람들로부터 받은 시달림으로 인해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저놈을 개성으로 보낼까 서울로 보낼까”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 옛말이다. 일산은 상전벽해, 그 말이 가장 적합하다 할 정도로 급속도로 도시화되었고 자유로를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가장 큰 규모의 국도를 뽐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일산이라는 신도시에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그곳이 고향인 시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공광규, 김사인, 김승희, 김지하, 문성해, 문태준, 박남희, 유종인, 유형진, 윤제림, 이문재, 이병률, 장무령, 조현석, 차창룡, 함성호, 배문성 등등 쟁쟁한 시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손택수는 일산에 거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가 보다.
“부산에서 일산까지/택배로 건너온 달,/환하게 기운 쪽에서 울컥/찡한 시장기가 치민다”(「대보름, 환하게 기운 쪽」 부분). 택배로 받은 대보름 부럼과 찰밥을 먹고 찌그러진 사과를 깎다가 씨앗을 먹이기 위해 사과 스스로가 찌그러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찌그러진 달을 본다. 누군가 시인을 먹이기 위해 찌그러졌다면 그 사람은 단연 부모님일 것이다. 어찌 시장기가 치밀지 않겠는가?
안성에는 고은이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있고 장석주도 수졸재를 지키고 있다. 용인에는 박이도, 김윤배, 박해람, 박후기 등의 시인들과 분당에는 김태동, 심언주, 이나명, 이향지, 장인수, 박홍점 등의 시인들이 살고 있었다. 양평에는 박용하와 최근 이사를 한 장석남이, 안산에는 권형현, 배용제, 윤의섭 등이 있었으며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시인들이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참조로 한 주소록에는 인천에 약 40명 남짓의 시인들이 있었다. 김영승, 박청륭, 이가림, 이경림, 장종권, 정공채, 김영산, 이세기, 주종환, 함민복 등의 시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인천시 강화군에 거처하는 함민복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강화도 삶에 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나오다보면 힘이 들어 쉬면서 비늘 벗겨진 놈/먼저 버리고 또 힘이 들면 물 한 모금 마시면서/참숭어만 남겨놓고 언지, 형님도 가숭어 알지 아느시껴”(「어민 후계자 함현수」 부분). 강화 사투리의 진득한 맛과 뻘밭의 생태를 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중앙에 해당하는 대전에는 40여 명 시인의 주소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완하, 박진성, 손종호, 양애경, 이면우, 임강빈, 최원규, 황희순, 홍희표 등의 시인이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일찍이 눈물의 시인인 박용래가 오류동 엽전을 노래한 곳이 바로 이 대전이었다. 오래된 시집 속에서 홍희표 시인의 「신탄진 장날」을 다시 만났다. “봄나물 앞에 쭈그리고 앉은/일흔 넘은 할머니의 한 마디/“워디 사람이 애초에 높낮이가 있남?”/인형가게 옆에 쭈그리고 앉은/일흔 넘은 할아버지의 한 마디/“워쪄 막걸리나 한사발 때려봐?””. 저 삶의 때가 그냥 벗겨져 나오는 장터야말로 우리가 잃은 것 가운데 가장 값진 공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충남 역시 대전과 비슷한 40여 명 시인들의 주소지가 있었다. 천안, 공주, 서산, 논산, 홍성, 보령 등이 주요 주소지였다. 구재기, 김기중, 김순일, 나태주, 안수환, 유용주, 이정록, 임영봉 등의 시인이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특히 서산 출생으로 서산에 관한 많은 시를 써온 김순일의 시는 서산의 여항 시정을 잘 담고 있다. “갯가 안흥 색시가 근친을 왔다 새 신랑의 품속에서/야들야들해진 갯가 색시가 생글생글 근친을 왔다/바다가 달을 품고 응어리진 멍울을 푸는 밤 갯가 처녀들이 모여앉아 첫날밤 얘기를 졸랐다/<보리누름에 우럭은 그래도 눈이나 뜨고 먹지…눈도 못뜨겠더라>/갯가 처녀들은 가쁜 숨을 감추며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서산 사투리·4」 부분).
첫날 밤 이야기를 바닷가 풍물에 빗댄 이야기는 전통 서정의 해학적 정서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충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낯익은 이름들은 김신용, 송찬호, 오탁번, 최금진, 함기석, 허의행, 도종환, 양문규, 이안 등의 시인들이다. 김신용은 최근 치열한 시정신을 쏟아놓고 있으며 오탁번은 제천 원서문학관에 터를 잡았다. 함기석은 청주에서 지속적으로 전위적인 시 작업에 총력을 쏟고 있으며 도종환은 문화예술위원회 시 집배원을 통해 시를 대중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특히 도종환은 속리산 산방에 은거하여 아픈 몸을 치유하며 깨달은 「해인으로 가는 길」에서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돌아가는 길이 낯설지 않다”라고 노래한다. 지친 육신으로 바라보는 절체절명의 세계가 잔잔하게 펼쳐 있는 역설적 비감을 맛보게 한다.
강원도에 주소를 둔 시인은 35명 안짝으로 집계되었다. 강릉과 춘천에 가장 많은 거주지가 있었다. 고진하, 김선우, 박기동, 송준영, 이상국, 권혁소 등의 시인들을 확인하였다. 이미 타계한 이성선이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말을 버린 곳에서/무일푼 거지로/최후를 마치리.”(「절정의 노래 1」 부분)라고 비장한 노래를 부르던 곳이 바로 강원의 땅이다.
이십 년이 다 된 권혁소의 시집 『논개가 살아온다면』의 후기에서 권혁소는 “누님, 저는 강원도가 되겠어요. 하늘을 믿고 땅을 믿으면서 비교적 연약한 저는 누님, 그래도 강원도가 되겠어요. (중략) 끈끈한 눈물로 시를 쓰면서 누님, 저는 건강한 강원도가 되겠어요”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상응하는 자기 응시라고 오래 전 생각했었다.
경북을 주소로 한 시인들의 수는 32명이었다. 안동, 포항, 경주, 구미, 영주 등이 주요 주소지였다. 권선희, 서지월, 손진은, 안상학, 이위발, 권석창, 김만수, 배창환, 이종암 등이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나는 요즘 주막이 그립다./첫머리재, 한티재, 솔티재, 혹은 보나루/그 어딘가에 있었던 주막이 그립다”(「안동소주」 부분)라고 노래한 안상학 시인이 안동에 있다.
2002년 경북작가회의 시선집을 펼쳐보면 곳곳에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이종암의 「수평선 다방」, 권선희의 「북어의 노래」가 그렇다. 특히 권선희의 사투리는 서정시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지도 젖지도 못한 사람들이 동동거린다”(「피데기」 부분)라고 구룡포 연작 시리즈에서 권선희는 바닷가 소식을 전해준다.
경남에는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 진주, 마산, 사천, 밀양, 창원, 경산, 거창 등에 100여 명의 주소지가 확인되었다. 서울과 경기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인들의 주소지가 경남에 있었다.
강희근, 김언희, 김은정, 김이듬, 박태일, 배한봉, 엄원태, 유홍준, 이달균, 이영수, 이우걸, 정일근, 고증식, 박남준, 박서영 등의 시인들이 경남을 주소로 하고 있었다. 김언희는 여성과 몸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어 왔고 정일근은 은현리에 칩거하면서 서정시의 날을 더욱 곧추세우고 있다. 유홍준은 최근 시를 통하여 극한의 서정시를 실험하는 중이다. “저 왁새들/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우포늪 왁새」 부분)라고 노래한 배한봉의 시는 생태시에 대한 새로운 지경을 열고 있다.
대구에서는 70여 명의 시인 주소를 확인했다. 강문숙, 강현국, 구석본, 김용락, 류인서, 문인수, 박정남, 배영옥, 송재학, 송종규, 여정, 이규리, 이기철, 이동순, 이성복, 이태수, 이하석, 장경린, 장옥관 등 우리 시단에 굵은 힘줄을 새겨놓은 여러 시인들이 있었다.
이성복이 남겨놓은 상처는 오래도록 시를 꿈꾸었던 문학청년의 고뇌로 전이되었던 한 시절이 있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시작하여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편들은 문청들의 텍스트가 되었다. “세 사내는 친하다. 작당이 아니라 모국어처럼/합수처럼 친하다. 1955년생, 동갑내기에 똑같이 삼형제 중 장남이다. 세 사내는/오늘의 시 동인이다. 표정이 비슷하다./그늘이 깊다./나고 자란 이야기가 애솔 같아서 과목이 같은 침엽의 어둠이 전신에 예민한 것이겠다. 나는/세 사내의 성명 첫 글자를 따 장엄송이라 부른다.”(「장엄송」 부분)
문인수는 장옥관, 엄태원, 송재학 등 3인의 시인들을 함께 노래하며 ‘장엄송’이라는 탁월한 기지를 발휘한 적이 있다. 대구 특유의 정서를 어느 술자리에선가 ‘아나키스트’라고 칭한 적이 있었다. 팽팽한 긴장과 단절 그리고 직입直入을 대구 시인들의 시에서 느낄 때가 있기 때문에 선뜻 동의했던 적이 있다.
부산에서는 90여 명의 시인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경주, 강영환, 김경삼, 김경수, 김석규, 김언, 김종미, 김참, 김형술, 노혜경, 박강우, 서규정, 안효희, 유병근, 정익진, 조말선, 최영철, 허만하, 김수우, 신진, 손순미 등의 시인들이 낯익은 이름이었다.
사실 부산은 어느 지역보다 전위적 글쓰기를 선도해 온 곳이다. 사실 전위란 늘 불안하고 항상 새로운 전위에 의해 밀려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위를 실천한다는 것은 첨예한 시대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너무도 괴로운 작업이다.
부산의 시인들이 전위의식의 줄을 늘 놓지 않고 끌어가고 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사실이다.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허만하의 시편들이다.
갈수록 생의 비의에 대한 묘사는 섬뜩한 칼날과도 같이 번뜩이고 있다. 새로 창간된 잡지 《유역流域》을 읽다가 허만하의 산문을 만났다. 남명 조식의 강학당인 뇌룡정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서 그의 시론을 엿볼 수 있었다. “산이 크고 맑은 지리산 자락에서 내가 읽었던 것은 풍경이 아니라 방울과 칼의 의미였다. 그날따라 이마에 흰 눈을 이고 천왕봉에서 내리치는 재넘이는 차갑지 않았다. 시를 쓴다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누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따지고 드는 듯했지만 그것은 쏴하고 땅을 구르는 가랑잎 소리임이 분명했다.” 남명 조식이 옷 띠에 방울을 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성찰했듯이 방울과 칼로 상징되는 시의식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듯했다.
광주에서는 50명 남짓의 시인 주소를 확인하였다. 강경호, 강인한, 곽재구, 김규성, 김미승, 김영박, 나희덕, 문병란, 범대순, 신덕룡, 염창권, 이대흠, 이은봉, 정영주, 정윤천, 송기흥, 허형만 등이 낯익은 시인들이었다.
일찍이 요절한 김만옥이 무등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던 아픈 추억이 전설처럼 전해지거니와 문병란이 「직녀에게」를 통하여 맑고 곡절하게 민족통일에 대한 바람을 간절히 노래했고, 곽재구가 「사평역에서」를 통하여 쓸쓸한 그리움을 전해준 바 있다.
도시 저류에 흐르는 반항의 혼을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터이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단지 염창권의 시에 나타난 기존의 시의식과는 다른 저항의 혼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 행적이 변방을 떠돌다/이곳 소슬한 정자에 이르러,/한낮의 정적 가운데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구나./내 여정이 귀양지를 찾고 있으니/이제 감히 내 마음속의 그대에게 묻겠다.”(「면앙정에서」 부분)
여기에서 염창권이 묻는 것은 송순에 대한 예찬이나 찬양이 아니다. “노래로써 세상을 다 채울 수 없는/진득한 허기가/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그대 깨닫기나 했었던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일지라도 사람들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전북에서는 50여 명 남짓의 시인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주를 주소로 한 시인의 수가 가장 많았다. 익산, 남원, 고창, 완주, 임실, 무주, 부안 등 전북 전역에 분포도를 보여주었다. 강연호, 김용택, 박성우, 송반달, 안도현, 정양, 복효근, 심호택 등의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섬진강 시편을 보여주었던 김용택, 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 따뜻한 정서와 변혁을 꿈꾼 안도현 등의 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젊은 시인 박성우는 쓰리고 아픈 시를 쓰고 있다. 탄일종이 울리는 성탄전야에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인공호흡기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친전」 부분)로 시작하는 시편은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냉철하게 묘사함으로써 더 가슴 아픈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전남을 주소로 한 시인들의 수는 30명 남짓이었다. 고재종, 김선태, 송수권, 김경윤, 김해화, 나종영, 박관서, 이원규 시인 등이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남도의 한스러운 가락을 깊이 힘줄에 새겨놓은 송수권, 노동의 고통과 힘을 노래한 김해화, 자연을 탁발하고 있는 이원규 시인을 떠올릴 수 있다. 순천, 목포, 담양, 무안, 해남, 곡성, 구례, 영광 등이 주요 주소지였다.
남도의 풍광에 대해 말해 무엇하겠는가만은 특히 정자가 펼쳐진 광주 외곽과 담양의 정취는 아프도록 그윽한 것이다. 빼어난 문체로 세상을 묘사한 김훈의 『풍경과 상처』에서 담양 수북 마을 대밭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숲에 내리는 눈은 숲의 연두를 지우지 않는다. 그 눈은 연두의 모든 속성과 모든 다양성을 한꺼번에 드러내 주는 것이다. 연금술이 깨져버린 땅 위에서 대나무 숲을 견디면서 건너가는 자들의 위엄으로 고요하다. 수북水北의 넓은 들판에서 대숲은 섬처럼 듬성듬성 들어서서 집과 마을들을 감싸고 있다.
이 수북은 고재종의 고향이다. 시 「사람의 등불」에서 고재종은 다음과 같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썼다. “저 뒷울 댓이파리에 부서지는 달빛/그 맑은 반짝임을 내 홀로 어이 보리//섬돌 밑에 자지러지는 귀뚜리랑 풀여치/그 구슬 묻은 울음 소리를 내 홀로 어이 들으리”.
제주에서는 20여 명의 시인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찍이 문충성은 제주바다에서 삼신할망과 김통정 그리고 바다의 통곡을 노래했다. 고정국, 변종태, 윤석산, 정찬일, 한기팔, 문충성 등의 이름이 낯익었다.
일찍이 추사가 대정마을에 유배되었을 때 제자인 이상적에게 보낸 세한도는 오늘날도 시인들의 정신적 좌표가 되고 있거니와 아름답지만 먼 섬 제주도의 시정은 끊임없이 뭍에 대한 그리움과 반항의 질서로 작용해왔다. “이승의 아픔 훌훌 벗어 내놓고/ 남 다 잠든 밤 외로우면/졸졸 물소리나 내지르며/서귀포西歸浦 남쪽 바다/지금까지 아무도 모르던 세상으로 가서/물 소리 나라나 세울거나”(「정방폭포正房瀑布」 부분).
문충성이 노래한 제주의 모국은 바로 물소리의 나라였다. 서귀포 팔십리가 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앞에 말한 두 주소록을 바탕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시인들의 거처를 살펴보았다. 이 자의적인 작업은 큰 의미나 가치가 있을 수 없다. 앞에 말한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거주지는 고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고향에 대해서는 의식의 지향이 있다면 고향을 떠난 공간에 대해서는 의식의 배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아스팔트컨트에게는 고향이란 것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서울살이를 유목적 삶이라 칭했던 것이다. 공간과 삶의 지향이 빚어내는 불일치야말로 어쩌면 시의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인이여, 그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리.
우대식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주거와 창작공간으로서의 시인의 방
박 래 부
모든 것으로 미루어 낙천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류 고통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다. 일몰을 바라보는 것은 감옥에서나 궁궐에서나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염세적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의도했든 안 했든, 시를 쓰는 것은 장엄한 일몰을 바라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런 해석을 더 연장하면, 시 쓰기에 적합한 환경과 공간은 궁궐이나 감옥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창조를 위한 공간적 차이가 얼마나 좋은 시로 나타나느냐는 점이 아니라, 어떤 성격과 유형의 시로 발전하느냐는 점일 것이다.
쇼펜하우어 말에 적합한 시인으로 릴케와 김남주를 떠올려 본다. 릴케는 중세풍의 우아한 고성古城을 떠돌며 순도 높은 존재론적 시를 남겼다. 궁핍 속에서도 새로운 연인을 만나 아드리아 해변의 두이노성과 뮈조트성으로 방랑하며 신과 고독, 절망 등 형이상학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면하며 감동적인 시를 생산해 냈다. 40대 후반에 쓴 그의 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은 우리 전시대의 시인들에게 차원이 다른 명상의 흔적을 남겼다.
김남주는 10년 동안 감옥에 갇힌 채 혁명을 꿈꾸는 뜨겁고 육성적인 시를 썼다. 그처럼 오래 자신의 사상이나 활동으로 인해 감옥생활을 한 시인도 없고, 옥중시가 자신의 대표시가 된 시인도 없다. 그가 남긴 시 470여 편 가운데 300여 편이 감옥에서 씌어졌다. 시집 『진혼가』 『사랑의 무기』 등에 실린 많은 시들은 연필 토막 하나 가질 수 없는 감옥을 온갖 방법으로 뚫고 나와 햇볕을 본 시들이다.
때로 시는 범상치 않은 공간에서 태어난다. 또 다른 환경도 있다. 이해인 수녀는 정갈한 시로 수녀원 담장 밖의 독자를 감동시켜 왔다. 19세 때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들어간 그는 『민들레의 영토』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집을 펴내며 많은 세속의 독자를 거느린 이채로운 시인이 되어 있다. 그의 원고료 수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인 수녀원으로 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2006년 문화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문인의 월평균수입은 100만 원 이하가 40%로 가장 많다. 그러나 65%의 문인은 문학 활동에 만족하고 있다. 많은 시인은 저마다 현재의 공간을 견뎌내며 좋은 시를 써왔고, 또 쓰기를 꿈꾸고 있다. 그것은 시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열망 때문이거나, 자신의 운명일 것이다.
부산의 최영철은 20년 넘게 38평짜리 집에 살다가 3년 전 도심을 벗어난 수영만 쪽의 40평 집으로 옮겼다. 2평이 넓어졌으나 커다란 변화다. 전에는 4가구가 한집에 살았는데 지금은 그가 한 집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아이 둘까지 거느리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아이가 잘 곳이 없어 다락방에서 자고 그랬다”며 웃는다.
지금도 살림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시 「자동납부 너」를 보면, 자동납부로 내는 월 5,000원 회비가 봄부터 가을 사이에 그를 세 번이나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5월 24일 지급금액 2,996원 잔액 0, 7월 26일 지급금액 1,122원 잔액 0, 9월 26일 지급금액 4,032원 잔액 0… 누가 볼까 돌아서서 통장을 살피는데 그래도 그렇지, 단돈 몇 원까지 깡그리 털어 달아난 자동납부 너 이놈, 눈물이 찔끔 났다…….
함민복은 10년 전 강화도 마니산 자락에 들어가 농부처럼, 혹은 수도승처럼 혼자 살고 있다. 보증금 없이 월 10만 원을 내는 허름한 농가에서 고욤나무를 벗하여 텃밭에서 농사도 짓는다. 동네사람과 어울려 조개, 낙지, 망둥이, 새우 등도 잡고 해가 저물면 소줏잔을 나눈다.
(사진 제공 : 김수우 시인) |
조은도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이다. 그의 산문집 『벼랑에 살다』는 여성시인이 도시에서 홀로 사는 아슬아슬한 기록이다. 그는 광화문에 이웃한 종로구 사직동에서 개 한 마리를 키우며 산다. 희한하게도 개발이 되지 않아 거의 몇십 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의 14평 크기의 낡은 한옥이다. 똑같이 가난하지만 거친 동네 여인들과 때로는 사소한 일로 부딪치기도 한다.
태릉의 부모 집을 떠나 독립하던 날 그는 기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그날의 슬픔이 밀려온다고 한다. 이 집에는 여러 명의 친구가 찾아와 자고 가기도 한다. 그의 코딱지만한 방에서는 오래 된 찻잔과 낡은 창에 붙여 놓은 그림, 착착 개어놓은 옷 등이 정겹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는 몇 안 되는 시인들뿐이다. 시를 쓰는 어떤 친구들은 나보다 가난하고 현실감각이 없다. 그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 책에는 황인숙 얘기도 나온다. 그도 용산구의 오래된 동네에서 비슷하게 살며 시와 산문을 열심히 쓴다. 그는 개 대신 고양이를 키운다. 신문에 연재한 산문을 보면, 글쟁이끼리 국내외 여행도 자주 하며 꽤나 바빠서 쓸쓸할 시간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어린 딸과 사는 씩씩한 ‘싱글맘’ 신현림은 지난해 4월 수원 아파트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정독도서관, 선재아트센터에서 가까운 곳을 찾다가 종로구 체부동의 한옥에 전세를 들었다. 그 한옥에는 책을 보관하는 문간방, 욕실, 침실, 주방을 겸한 긴 방 등이 골고루 있어서 매우 만족하고 있다. 중국차를 파는 찻집에서 보이차를 마시고, 저녁에는 경복궁 산책로에서 운동을 한다. 딸은 골목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조은은 시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은 자기 자신이다.” 단순성, 순수성, 결벽성 등이 시인을 시인답게, 혹은 가난하게 하는 것 같다.
시인은 애초에 방랑 유전자를 많이 지니고 태어나는 듯하다. 유럽의 음유시인부터 그렇다. 그리스 시대의 떠돌이 서정시인과 중세기에 연애시나 민중적 노래를 부르면서 각국을 편력하던 시인들이다. 동양의 두보나 김시습 김병연 등도 정착을 거부한 시인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방랑기질이 시인의 집을 남루하게, 또는 남루에 스스로 개의치 않게 하는 것 같다. 함민복 황인숙 조은의 방은 현실에서 공간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의 정신은 공간에 매이지 않고 이 도시와 산하를 방랑하는 것 같다.
굳이 비교해 보면, 시인은 평균적으로 소설가보다 독립적이고 독선적이고 때로는 다혈질적이다. 술자리 싸움도 소설가보다는 시인 주석의 활극이 볼만하다. 시인은 대체로 소설가보다 벌이가 시원찮고, 또 예술가 중에서도 가장 경제적 무능력자층에 속할 것이다.
먹고 자는 현실의 집과 방 외에, 심리적·정서적 공간도 있다. 시대적 우울이 감염되는 마음 속의 공간이다. 김정환은 여기서 얻는 병을 울화병이라고 불렀다. 그는 얼마 전 소주를 마시다가 “지금쯤 박영근이 죽을 시간인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병원에서 산소 마스크를 떼기로 예정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치사량의 시대고와 울화병에 스러진 문인으로 김관식 천상병 조태일 박영근 등을 꼽을 수 있다. 가난, 우울, 울분과 더불어 사는 시인이 많다. 조심해야 한다. 김정환 자신은 울화병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술로 응어리를 풀며 산다고 했다.
물론 시인이 모두 가난한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방문한 강은교 김용택 등의 집과 방은 모두 검소하긴 해도 궁핍해 보이지는 않았다. 책들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방은 부유했다. 학교라는 직장이 그들의 생활을 버텨주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학교는 가장 익숙하고 생산적인 직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시인의 처지는 우리 사회의 통점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유사하다. 그들에게는 제도적 보살핌이 필요하다. 정식 등단을 하고 일정한 기준과 자격을 갖춘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시인은, 국가에 의해 최소한의 창작활동과 생활이 보호되어야 한다. 평화와 명예를 존중받아야 한다.
마침 시인 화가 등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안이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외국에서와 같이 정규 교사가 아니지만 실력 있는 예술가들을 각급 학교 교육에 참여시켜, 예술교육의 질도 높이고 예술가의 생활도 보호해 주는 것을 제도화하는 법안이다.
그러나 막상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강사풀제의 공정한 운영, 현행교육제도와의 결합, 기존 교사와의 관계 등이 복잡하게 드러나 쉽게 결말을 못 보고 있다. 좀더 서둘러 반드시 입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명예시인이 있다. 시와 시인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고, 시와 관련된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긴, 한국일보 선배인 김성우 명예시인이다. 그는 얼마 전 고향인 남해 욕지도에 집을 지었다. “돈이 모자라 크게 짓지는 못했지만, 평생 하고 싶었던 샤토를 지었다”고 아쉽고도 흐뭇해 했다. 샤토는 고풍스러운 성이나 저택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그의 샤토가 구체적으로 어느 규모인지, 어떤 양식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명예시인이 귀거래하기에는, 또 그의 친한 시인들이 무시로 놀러 가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정태춘이 작사·작곡한 <시인의 마을>은 다소 구투이긴 하지만 뛰어난 서정의 노래다. 그 ‘시인의 마을’이 어디쯤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슴을 한 구석을 따스하고도 쓸쓸하게 훑고 지나간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이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김 명예시인의 ‘샤토’나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떠올리면, 시인이 좀더 예술가다운 주거 환경에서 살고 시를 쓰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아진다. 시인협회가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하여 시인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집은 소박한 규모라도 릴케가 거주하던 두이노성처럼 해변이나 숲 등 자연과 이웃한 마을이 좋을 듯하다. 또한 도시 한 모퉁이라도 평화와 안전을 느낄 수 있는 동네라야 할 것이다. 시를 생산하는 농장이나 작업장이기도 한 그 집들은 영구 거주든, 임대 형식이든, 단기간 이용하는 별장식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또는 이것들의 혼합형태라도 무방할 듯싶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천사만려했던 철학자의 말처럼, 시인이란 가슴에 심각한 고민을 품고 탄식과 흐느낌을 아름다운 노래처럼 부르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삶과, 그들의 시적 충동에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시인에게 시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혹한 형벌이며,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라도 시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한낱 고통스런 불모의 땅일 뿐이다.
인의 처소는 그들로부터 시적 열망과 치열함을 앗아가거나 무디게 하지 않는 공간이어야 한다. 정부나 사회가 지금 시대에 맞게 시인의 집과 방에 대해 배려를 해야 마땅하지만, 그것은 지극한 섬세함이 전제돼야 한다.
박래부 1951년 경기 화성 출생. 현재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 저서 『한국의 명화』 『김훈 박래부의 문학기행-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작가의 방』 등.
풍월주인風月主人의 누실陋室
심 경 호
고전시가에 나타난 집은 가족의 주거 공간이라는 의미가 강하지 않다. 고전시가는, 한시든 시조든, 시인의 집을 세속의 먼지로부터 격리시켜둔다. 다만 그 집은 세속의 바깥인 청산에 위치할 수도 있고, 세속의 안쪽인 성내에 위치할 수도 있다. 시인의 정신적 경계가 자신의 집을 세속으로부터 격리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격리를 통해서 거꾸로 시인은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중국 북주北周 때 유신庾信은 「소원부小園賦」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서너 이랑 크기의 허름한 집이 고즈넉하게 세속의 바깥에 있기에, 짐짓 여기서 살면서 바람과 서리를 피할 수가 있다. 안영晏嬰이 그랬듯이, 저자 가까이 살더라도 아침저녁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반악潘岳이 그랬듯이, 도성에 임하여 거처하더라도 한가한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련다.” 나의 집을 세속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옛시인들은 한가한 생활의 즐거움을 얻었다.
전근대 이전의 옛시인들은 대부분 정치인이었다. 교양을 갖춰 조정에 나아가 자기의 보편이념을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물러나고자 하였다.
특별히 시절이 어두울 때는 세속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여 처사(處士,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덕을 함양하는 존재)나 일민(逸民, 세속을 의도적으로 등진 존재)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가 시인인 한에는 처사나 일민의 삶을 꿈꾸었다. 그들은 동진 때 도연명陶淵明이나 송나라 때 임포林逋의 은둔 방식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도연명의 집이나 임포의 집과 같은 공간으로 만들려고 의도하였다. 그들이 꿈꾼 집은 세속의 바깥에 위치해 있고, 산수자연과 연속되어 있는 그런 집이었다.
이를테면 정조 연간의 남인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정범조(丁範祖, 1723-1801)는 벼슬길에 나갔어도 처사의 풍모를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야인山野人이라 불렀다. 그는 41세 때까지 고향 원주 법천동에서 지내다가, 벼슬살이를 시작한 뒤에도 체직될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가 동산을 가꾸었다. 그는 그곳에‘청시야초당淸時野草堂’이란 이름의 집을 두었다. 시절이 지극히 맑지만 자신은 재야에 있으면서 초당을 짓고 살겠다는 뜻을 부친 것이다.
「푸른 둥지를 얽고搆靑巢」라는 장편 고시의 일부를 보면, 그의 초당이 어떠한 구조인지 잘 알 수 있다.
庭中有奇松 정원 가운데 기이한 소나무
半畝垂翠旓 반이랑 밭에 푸른 깃발 드리워
淸陰接瞑壑 맑은 그늘이 어두운 골짜기에 이어지고
秀色浮春郊 아름다운 빛은 봄들에 넘치나니
攬結爲我屋 그 가지를 엮어서 내 집 만들고
戶牖排蒼梢 푸른 가지들 밀쳐두고 창문과 문을 내었네.
傴僂入其中 몸 굽혀 안으로 들어가면
枕席幽而凹 잠자리는 조용하고도 우묵하나니.
玲瓏知月窺 영롱하게 달빛이 엿보고
颼飅有風敲 솔솔 바람이 두드리네.
四大於此寓 땅, 물, 불, 바람으로 이루어진 몸을 여기에 부쳐
萬緣亦已抛 세간 인연을 모두 버리련다.
정범조는 도연명의 고향이자 은거지인 시상촌柴桑村과 임포의 고산孤山을 그린 <시상고산도柴桑孤山圖>를 거처에 걸어 두었다. 도연명은 진晉이 망하려 하므로 두 성姓을 섬길 수 없기에 기미를 보고 떠나서 절개를 온전히 하였고, 임포는 송나라 진종眞宗이 좌도(불교)에 미혹되어 바로잡기 어려웠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그는 해석하였다. 그 역시 정치현실에 불만을 지녔기에 어쩔 수 없이 은둔을 택한다는 뜻을 넌지시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옛시인의 집에는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하였던가? 조물주의 다함없는 창고였다. 곧, 바람과 달로 형상되는 자연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이 지었다는 시조에 보면, 옛시인은 물욕을 버리고 풍월주인風月主人을 자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 이 시조는 유자신이 지었다고도 한다.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치름 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과 풍월을 달라 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그것을 팔아보려고 권세가를 찾아갔더니, 턱없는 흥정을 한다. 저쪽에서 강산풍월이라면 사겠다고 하지만 그것만은 안 되겠다고 했다. 강산풍월만은 돈이나 권세와도 바꿀 수가 없다고, 시인은 풍월주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 시조의 정신은 실은 송나라 때 문호 소식(蘇軾, 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서 나타난 자유인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적벽부」를 보라. “무릇 천지 사이의 만물은 각각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비록 터럭 하나라도 가질 수 없으나,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그것을 들어 소리가 되고 눈으로 그것을 보아 색을 이룬다. 그것을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없는 창고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것이다(且夫天地之間에 物各有主라 苟非吾之所有인댄 雖一毫而莫取로되 惟江上之淸風과 與山間之明月은 耳得之而爲聲하고 目遇之而成色이라. 取之無禁하고 用之不竭하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요 而吾與子之所共樂이니라).” 옛시인들은 바로 자신의 집에 조물주의 다함없는 창고를 갖추었던 것이다.
물론 옛날에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빈부의 차이가 집의 규모나 구조를 결정지었다.
조선후기의 이른바 경화세족에 속하는 시인들은 세간 규모가 컸다. 골동과 서화도 갖추었다. 다만, 그 시인들도 집의 구조만은 늘 주체의 함양 공부와 연결시켜 생각하였다.
조선후기의 문인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집터를 고르며 간단히 쓰다卜居識」라는 수필에서, 재동 집을 지을 때 방과 정원에 모두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나가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마음 자세를 다잡았다. 곧,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이르는 순서대로 보면 이러하다.
바깥문은 원득문爰得門. 배움을 통해 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문 안의 빈터는 만간대萬間垈. 처음 배울 때 길을 개척하고 식견을 넓힌다는 뜻이다.
가운데 문은 용중문用中門. 식견이 넓어진 뒤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가운데 문 바로 안쪽의 마당은 허백정虛白庭. 중도를 따른 뒤 마음을 비워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마당 지나 마루는 관원헌觀遠軒. 마음을 비워 밝아지면 먼 곳도 모두 살피게 된다는 뜻이다.
마루 지나 서재는 수일재守一齋. 멀리 보더라도 지키는 것이 전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재의 곁방은 지사료持思寮. 지킴이 전일해도 사려가 항구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안채의 문은 요락문聊樂門. 사려가 정심해지면 도가 갖추어져 즐거움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안채의 마당은 식란정植蘭庭. 내면이 충실하면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는 뜻이다.
안채의 정원은 견산대見山臺.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라도 존엄하게 행동하여 남이 경외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채 대청은 아우당我友堂. 고상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벗을 구해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다.
서쪽 침실은 영수실永綏室. 벗이 생기면 오래 함께 하여 편안하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쪽 채는 정수각靜壽閣. 고요하게 심신을 기르고 장수하며 그곳을 누린다는 뜻이다.
지나치게 조도(造道, 도에 나아감)의 차례로 이상화하기는 하였으나, 옛시인들은 이러한 집 구조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였고, 또 그런 집 구조에서 내면의 함양 공부를 연상하였던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경기지방에 세거지로서 전장을 두었고, 서울에는 벼슬살거나 일을 보러 올 때 머무는 교거僑居를 마련하였으며, 때로는 경강(京江, 한강 가운데 광나루부터 마포까지의 지역) 부근에 별장을 지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대개 집에 반드시 정자나 규모가 큰 누헌樓軒을 두고, 자연을 감상하면서 시주詩酒를 즐겼다.
이에 비하여, 가난한 시인은 거주지의 집 이외에는 달리 교거나 별장을 마련할 수 없었다. 집의 규모도 작았으므로, 중문이고 대청이고 곁채를 갖출 수가 없었다. 실제로 위에 든 홍길주의 경우, 재동에 이사하기 전에는 북산(北山, 인왕산) 기슭에 작은 집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집은 겨우 방이 두 칸이었다. 다만, 그 집은 산과 들과 산기슭과 숲이 보이고 방은 조용하고 밝아서, 그 가운데서 책을 읽기에 알맞았다. 홍길주는 그 집에서 우주만물의 이치와 교감하여 그것을 지킨다는 뜻에서, 편액을 ‘수일守一’이라 하였다.
그런데, 옛시인들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대개 정원이나 화초밭을 집안에 두었다. 특히 가난한 시인들은 화초밭을 좋아하였다. 조선전기의 자유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예를 상기하라. 사육신의 죽음 이후에 관서, 관동, 호남을 떠돌던 그는 28세 되던 1462년부터 37세 되던 1471년 봄까지 경주 금오산에 정착하였다.
그 때 머문 곳은 용장사의 승료이거나 그 부근의 초가였지만, 그는 매화를 심고 차나무를 길렀다. 더구나 성균관 시절 한 담요에 앉아 형님 동생 하였던 고태필高台弼이란 사람에게 화원의 꽃을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화초 재배에 일가견이 있었다.
곧, 1472년, 고태필이 동지중추부사에 갓 임명되었을 때 화원에 꽃 기르는 방법을 자문하자, 김시습은 사계화(장미)·여뀌꽃·국화·자지紫芝·파초芭蕉·원추리·해당화·작약·아가위꽃[棠花]·달꽃[月花]·푸른 연[淸蓮]·목련木蓮·서향화瑞香花·배추꽃[菜花]·흰 국화·붉은 여뀌[紅蓼]·토끼풀·산삽주[山薊]·황정(黃精:둥글레)·승검초[當歸]·생강[子薑] 등의 꽃과 풀, 약초를 재배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시로 적어 보냈다. 게다가 가산假山을 만들고 자분瓷盆에 꽃을 심는 방법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고태필에게 정원과 분재의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1471년 이후 김시습은 서울 동쪽의 수락산에 거처를 정했는데, 1483년 49세로 서울과 완전히 결별하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 그의 집은 지인이었던 남효온南孝溫도 제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에 위치하였다. 그런 곳에서 김시습은 도연명을 본떠서 작물의 성장에서 생명의 운동을 감지하고, 노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만, 부유하든 가난하든, 옛시인들은 이것만은 잊지 않은 것 같다. “진실로 뜻에 맞고 그 몸에 편안하다면 낮은 처마에 좁은 방이라도 천하의 넓은 집[광거廣居]이 되기에 족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고래등 같은 큰 집에 아름다운 기둥을 가진 집이라도 굴속같이 낮은 집만도 못하다.” 그렇기에 시인들은 자기 서실을 누실(陋室, 누추한 방)이라든가 용안실(容安室,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의 작은 방)이라고 부르고는 하였다.
그런 관념은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과 통한다. 이 글은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던 뜻을 부연한 것이다.
산이 대단한 것은 높다는 점에 있지 않으니, 선인이 살고 있으면 유명하게 된다. 물이 대단한 것은 깊다는 점에 있지 않으니, 용이 살고 있으면 신령한 곳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나의 누추한 집이기는 하지만, 다만 나의 덕성만큼은 향기가 높다. 반점 같은 이끼는 계단 위에 초록빛이고, 풀빛은 주렴 너머로 푸르게 눈에 들어온다. 담소하는 사람들은 큰 학자들이고, 왕래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흰 옷 입은 천한 자가 없다. 이 누실에서는 흰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가다듬어 연주할 수 있고, 황금처럼 귀한 경서를 읽을 수도 있다. 현악기나 관악기의 요란한 음이 귀를 어지럽히는 일도 없고, 또 관청의 공문서나 편지로 신체를 피로하게 하는 일도 없다. 남양의 제갈량 초려나, 촉 땅 서쪽에 있었던 양웅의 재주정載酒亭 등 예전 명사들의 그윽한 암실에 비교되지 않겠는가.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 군자의 덕이 있을 때에는 공자도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옛시인들은 집 안에서의 가족생활에 대해서는 그리 시문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에 대해 애정이 없거나 가부장의 권위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를테면 도연명은 부인 적씨翟氏와의 사이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 정약용은 부인 홍씨와의 사이에 열 명의 자제를 낳아, 그 가운데 셋을 건졌다. 도연명이 귀거래를 감행하고 정약용이 긴 유배 기간 동안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각기 부인의 현명한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연명은 「자식들을 꾸짖는다責子」 시에서, 아들 다섯이 모두 지필紙筆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제6련에 “아들 통通은 아홉 살이나 먹었으면서, 찾는 것이라곤 배와 밤이라네[通子垂九齡 但覓梨與栗].”라고 한숨지었다. 그러한 시를 남겼다는 것 자체가 가족생활의 안온함을 거꾸로 드러낸다. 두보杜甫도 사천 일대를 유랑할 때 가족들을 이끌고 다녔고, 가족의 곤궁함에 안쓰러워하는 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내 생각에 옛시인들은 속세와의 결별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던 까닭에, 집을 가족의 주거공간으로 파악하지 않았다고 본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균열이 없었거나, 오늘날과는 달리 그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심경호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저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다산과 춘천』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이 있음.
집을 즐거워하라
장 석 주
먼 곳을 떠돌다가 돌아왔을 때, 창문이 환하게 비쳐나오는 집의 불빛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한다. 그 떠돎이 곤핍한 것이었다면 귀소歸巢의 기쁨은 더욱 커져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을 것이다. 그 집은 안방, 건넌방, 사랑방, 마루, 툇마루, 부엌, 아궁이, 굴뚝, 마당, 뒤란, 헛간, 장독대, 우물, 닭장을 두루 갖춘 온전한 집이다. 저 아늑한 거소!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노래가 실감나는 상황이리라.
그 불빛이 한 점 의혹도 없는 투명한 기쁨으로 빛나는 것은 그것이 조난과 표류에 마침표를 찍는 신호인 까닭이다. 부엌 창으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한 어머니의 그림자가 비치고, 환한 거실 창으로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 어린 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광경이 홀연히 나타난다. 그때 우리 심장은 더 빨리 뛰고 가슴은 벅찰 것이다.
1920년대 김소월의 시에서 집은 잃어버린 존재의 거처, 돌아가야 할 시원이다. 「집 생각」·「우리 집」·「옷과 밥과 자유」·「두 사람」 등의 시편에서 한결같이 시의 화자들이 집을 떠나 있는 상황이 제시된다. 집을 떠난 게 자의에 의한 것이든, 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더 큰 힘의 강제에 의한 것이든 그것은 외로운 심사와 슬픔, 집을 향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우리 집」), “타관만리에 와 있노라고 / 산중만 바라보며 목메인다”(「집 생각」), “집을 떠나 먼 저 곳에 / 외로이도 다니던 심사를!” (「두 사람」). 김소월 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슬픔과 정처없음의 심리는 바로 이 집 떠나 있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의 백석에게 집 없음의 상황은 더욱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세목으로 제시된다. 「고향」·「북방에서」·「흰 바람벽이 있어」·「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信義州 柳洞 朴時逢方」 등이 대표적인 시다.
“난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어서”(「고향」),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북방에서」), “이 흰 바람벽에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흰 바람벽이 있어」),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구들은 시의 화자가 집없이 타지를 떠도는 삶의 고달픔을 말하고 있다.
「북방에서」를 보면 집은 ‘나’라는 주체를 감싸안는 태반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을 빼앗긴 것은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의 원인이 된다. ‘나’는 타관을 떠돌다가 문득 고향 집에 돌아와 보지만, 이미 조상들과 형제, 일가친척, 정다운 이웃, 그리운 것과 사랑하는 것, 우러르는 것, 나의 자랑이며 힘이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리하여 ‘나’는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 것을 바라본다. 넋없이 떠도는 보래구름은 집과 고향을 잃고 떠도는 ‘나’의 마음의 표상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타관의 낯선 집에 머물며 흰 바람벽을 보며 집없는 제 처지를 쓸쓸하게 돌아보는 시다. 그러다 문득 노모와 아내, 새로 태어난 아이가 함께 하는 정겨운 광경을 환몽처럼 그려보며 쓸쓸해진 심사를 담담하게 술회한다.
집은 실존의 중심 공간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집에 실존의 중심을 두고 거처한다는 뜻이다. 집을 중심으로 생활세계가 꾸려짐으로써 세계와의 유대와 자기동일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백석의 「가즈랑집」·「외가집」 등은 그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집은 거주공간이면서 친족과의 살뜰한 관계와 음식 섭취와 같은 감각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기초공간이다. 집을 잃는다는 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집을 잃은 자는 길로 내몰리고 길에 선 자는 불가피하게 삶의 무정향성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은 실질적인 것이다.
집없음의 처지에서 비롯된 떠도는 삶은 고단하고 쓸쓸하며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준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를 보면, 그 고통은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두 대표적인 시인들이 집없음에서 빚어진 삶의 무정향성과 그 정서를 노래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집 없음을 굳이 나라와 주권을 잃은 식민지 변방 소지식인들의 피폐한 정서적 표상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철학자들 중에 현대인을 ‘집 없는 인간’이란 은유로 현대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표현한 이들도 있다. 집 없는 사람은 외톨이요,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자이기 십상이다. 집-없음이란 실존적 토대의 부재를 뜻한다. 집-없음의 상황이란 안식처와 피난처가 없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다.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집에 산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집은 그 집에 거주하는 자의 육체이면서 동시에 영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집 없이는 삶도 없다. 집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있는 것이다.
무더운 자연 속에서
검은 손과 발에 마구 상처를 입고 와서
병든 사자獅子처럼
벌거벗고 지내는
나는 여름
석간에 폭풍경보를 보고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을
습관에서가 아니라 염려하고
3년 전에 심은 버드나무의 악마 같은
그림자가 뿜는 아우성소리를 들으며
집과 문명을 새삼스럽게
즐거워하고 또 비판한다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바람에서
느끼는 투지와 애정은 젊다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라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폭풍의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목사여 정치가여 상인이여 노동자여
실업자여 방랑자여
그리고 나와 같은 집없는 걸인이여
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검은 바람이 들어온다고 외쳐라
너의 머리 위에
너의 몸을 반쯤 가려주는 길고
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
―― 김수영, 「가옥 찬가家屋讚歌」1)
「가옥 찬가家屋讚歌」는 1959년도에 발표된 시다. “병든 사자獅子처럼 벌거벗고” 나는 여름 어느날 폭풍경보가 내려진다. 마루틈으로 바람이 새들고, 버드나무는 그림자를 흔들며 아우성을 친다. 악마처럼 검은 그림자를 흔드는 그 버드나무가 3년 전에 심었다는 걸 봐서 이 집은 적어도 시인이 3년 이상 거주한 집이다. 폭풍 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를 치르는 그런 밤에 ‘나’는 신문을 읽으며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고, 새삼 “집과 문명”이 보장하는 안전을 온몸으로 느끼며 즐거워한다.
마루의 작은 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서조차 젊음의 “투지와 애정”을 느낀다고 쓴다. 위험이 배제된 안전한 거소에 머무는 자의 여유가 없었다면 가질 수 없는 정서다.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라”라거나, “폭풍의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라는 시구는 집 가진 자의 보람과 기쁨이 한층 격앙되는 것을 보여준다. 폭풍을 피할 수 있는 집을 가진 소시민의 뿌듯한 보람이 화자의 심정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 그 들뜬 심정은 시의 후반부에 나오는 “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 “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에서 정점에 다다른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멋진 양철 채양”을 달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 그야말로 ‘가옥’을 ‘예찬’하는 마음의 격앙으로 터져나오는 이 외침은 뿌듯함을 넘어서서 환희 그 자체를 전달한다.
집은 눈과 비바람, 폭풍을 피할 수 있는 하나의 공간, 혹은 장소 이상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우연적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 내던져진 존재를 품어 안는 것이 집이다. 집은 존재의 요람이요, 보금자리다. 아울러 집은 길 위를 떠도는 모든 존재가 돌아가 쉬어야 할 궁극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이다.
집은 모든 ‘바깥’의 위험과 덫을 피할 수 있는 ‘안’이자, 실존의 뜻을 세우고 의미를 일구는 곳이다. 내가 나고 자란 집,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가 있는 집은 우리 존재의 시원始原이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 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 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에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너머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김명인, 「너와집 한 채」2)
「너와집 한 채」는 저 산골 오지에 있는 집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 시인이 상상으로 찾은 그 집은 아무도 찾지 않는 강원도 어느 산골 골짜기에 버려진 너와집이다. 그 너와집은 누군가 살았던 집이다.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이 모질었나 보다. 빈 너와집은 그걸 버티고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다. 그 빈 집은 쓸쓸한 개옻 그늘,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매운 연기, 토방 밖에 뛰노는 황토 흙빛 강아지 한 마리,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들로 인해 돌연 산 것들이 내는 왁자함과 움직임의 활기로 가득 찬 아늑한 거소의 공간으로 바뀐다.
그 아늑함과 은밀함이 ‘나’로 하여금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을 지우고 수제비 뜨는 처녀의 외간 남자로 붙박혀 살겠다는 결심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너와집은 세간붙이 없이 간소하게 사는 삶, 쌓아둔 재물 없이 원초의 삶을 일구기에 마춤한 집이다. 세상의 명리에 휘둘리는 저 번잡한 도시문명의 삶을 등지고 나이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로 숨어 살만한 집을 찾는 꿈은 곧 존재의 시원을 향한 꿈과 통한다.
어디 그런 꿈을 김명인 시인만 꾸었을까? 서정주는 이 시가 나오기 쉰 해 전쯤에 이미 「수대동시水帶洞詩」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흰 무명옷 가라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숫스러워지는생각, 고구려에 사는듯
아스럼 눈감었든 내넋의 시골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
등잔불 벌서 키어 지는데……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사렀구나.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아조 아조 인제는 잊어버려,
인왕산그늘 수대동水帶洞 14번지
장수강長水江 뻘밭에 소금 구어먹든
증조曾祖하라버짓적 흙으로 지은집
오매는 남보단 조개를 잘줍고
아버지는 등짐 서룬말 젔느니
여긔는 바로 10전 옛날
초록 저고리 입었든 금녀女, 꽃각시 비녀하야 웃든 3월의
금녀女, 나와 둘이 있든곳.
머잖어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섭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水帶洞 살리.
―― 서정주, 「수대동시水帶洞詩」3)
「수대동시水帶洞詩」는 1941년 에 남만서고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화사집花蛇集』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적어도 1941년 이전에 씌어진 시다. 「수대동시」의 중심 공간은 “인왕산그늘 수대동 14번지”에 “증조하라버짓적 흙으로 지은집”이다. ‘나’는 어쩐 일인지 이 시골구석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사렀구나.”와 같은 반성 끝에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완전히 잊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
이 수대동의 흙집은 남보다 부지런해서 조개를 잘 줍는 어머니와 등짐 서른 말을 거뜬히 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이자, 어린 시절 이웃집 금녀와 놀았던 추억이 깃든 집이기도 하다. 금녀는 새색시가 되어 떠나고 없지만, ‘나’는 봄이 오면 순박한 시골처녀인 금녀 동생을 얻어 가족을 이루고 수대동 흙집에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수대동 집은 ‘나’의 기억 속에서 흙의 소출에 기대 사는 건강한 삶의 터전이다. 어디서 살겠다는 장소와 거주공간의 선택은 곧 어떻게 살겠다는 의식이 떠미는 선택이다. 그 선택은 곧바로 현존의 테두리를 규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말할 것도 없이 문명을 등진 소박하고 건강한 삶에의 동경이 잘 드러나 있는 시다. 그 동경의 중심에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을 온통 “숫스러워지는생각”으로만 채우게 하는 시골의 흙집이다.
집은 잠자고 식사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곳이다. 집은 어느 곳보다 아늑한 생활과 안식의 공간이다. 아울러 쉬고 기력을 재충전하는 공간이요, 가족 공동체가 거주하는 신성불가침의 내밀한 공간이 바로 집이다.
일찍이 서정주는 「무등無等을 바라보며」라는 시에서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고 노래한 바 있다. 집은 청산이요, 자식들은 그 무릎 아래 키우는 지란이다. 집을 가진 자만이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다. 시인은 같은 시에서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라고 했는데, 이렇듯 지아비와 지어미가 서로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곳도 집이다.
이렇듯 집은 사적 경험과 기억의 공간이요, 인격을 키우고 다듬는 곳이다. 집은 탄생이나 죽음과 같이 중요한 실존적 사건을 경험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한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이렇듯 집은 인간 실존의 의미를 규정하는 근원적 공간이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것은 건축자재만이 아니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것은 거기에 몸담아 사는 이들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그것을 키워온 세월이다. 세월이 없다면 집도 없다. 프랑스 시인 루이 기욤은 “오랫동안 난 널 지었다, 오 집이여!”라고 노래한다. 집에 딸린 방들은 거기 사는 이들의 꿈과 행복을 배양하고 추억들을 간직한다. 그래서 모든 집은 존재의 집이요, 기억의 집이다.
우리 조상은 집의 기본적 구조에서 우주의 원리를 읽어냈다. 전통가옥에서 지붕은 하늘, 기둥은 사람, 주춧돌은 땅이다.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그 집에는 수호신들이 깃들어 산다. 지붕과 부엌과 우물에는 각각 다른 신이 산다. 우리 조상들은 그 신들이 가족에게 미치는 길흉화복에 개입한다고 믿었다.
집은 인간 본질의 실현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잘-존재함은 집과 더불어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집은 누구나 누려야 할 천부의 권리다. 집은 투자의 대상도 아니고 신분의 상징도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집을 투기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짓이다. 어떻게 타인의 ‘영혼’이며 ‘우주’를 담보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할 수 있는가! 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곳, 꿈을 키우고 추억을 만드는 곳, 삶을 누리고 향유하는 장소다. 집과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다.
1) 김수영, 『김수영-한국현대시문학대계 24』, 지식산업사, 1981
2) 김명인시선집, 『따뜻한 적막』, 문학과지성사, 2006
3) 서정주시집, 『花蛇集』, 문학동네, 2001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으로 등단. 최근에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와 평론집 『풍경의 탄생』, 『들뢰즈, 카프카, 김훈』, 『장소의 탄생』을 연이어 내놓은 바 있다. 계간 《시인세계》 편집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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