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여행길에 읽은 시들

시인 최주식 2013. 7. 26. 22:50

여행길에 읽은 시들

 

고성만 (시인 · 우리시 편집위원)


나는 여행길에 시집을 들고 간다. 차안에서 꺼내어 잠깐잠깐 읽는다. 여행지와 관계 있든 없든, 최근에 관심 갖게 된 시집을 들고간다. 여기에 지난 계절 여행지에서 읽었던 짤막한 시 몇 편과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소개할까 한다.

 

 

2년 전 초봄 매화 보러가자는 작당을 했다. 광주에 사는 조성국, 이지담, 염창권 시인,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유홍준 시인의 고향 산청엘 갔다. 산청에는 '원정매, 정당매, 남명매'라 불리우는 삼매가 있다. 그중 원정매가 대략 700년으로 셋 중에 제일 오래되었으며, 정당매는 600년, 남명매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 유홍준 시인의 안내로 남사마을 고택 안 원정매의 흔적을 힘들게 찾아볼수 있었다. 흰색과 분홍색 섞인 꽃잎들이 하늘 하늘 미명의 하늘에 피었다 지는, 남사마을은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과 담과 나무로둘러싸인 고즈넉한 곳이었다. 정당매는 단속사지에 있었다. 불에 타 없어진 단속사 자리에 잘생긴 탑 두 기와 당간지주가 있고 그 위에 정당매라 이름 지은 매화나무가 있어 봄이면 그 향기를 더한다. 정당매의 당당한 기품에 반하여 여러 컷의 사진을 찍었는데 유홍준 시인의 촬영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남명매는 남명 조식 선생의 사당 산천재 앞 뜰에 있었다. 사실 매화는 섬진강변 광양 매화마을이 유명하다. 하지만 매화축제 즈음해서 얼마나 사람들이 붐비는지 차를 돌려 돌아와야 했던 고통스런 기억이 새삼 떠올라 가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그에 비해 산청삼매는 호젓하기 그지없다. 시도 그런 것 아닐까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유홍준,「 사람을 쬐다」전문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기만의 기품을 자랑하는 것. 그날 우리는 김이듬, 조민 시인등과 어울려 ‘진주파’와 ‘광주파’가 함께 아주 맛있는 막걸리를 취하도록 마셨다.

 

여름

유월이 오면 나는 섬진강에 가고 싶다. 녹음이 짙어가는 섬진강변엔 유난히 밤나무가 많아서 비릿한 기운이 감돈다.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지리산 둘레길’이 나타난다. 지리산길엔 모내기가 한창이다. 이슬비 내리는 날 반달 혹은 초승달 모양 계단식 논에 가두어놓은 물거울에 얼굴을 헹구면 세상 시름은 깨끗이 씻기고 새로운 기운으로 충만해진다. 작년 초 여름, ‘ 운봉~주천’ 코스를 걸어가던 중 무척 고생한 일이 있었다. 그날따라 김밥, 과일, 초콜렛 등 예비식량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는데, 이제나 나타날까 저제나 나타날까 기다렸지만 산중에 가게가 있을 턱이 없었다. 산길 두 시간이 넘어 구룡치 아홉 굽이를 넘을 때는 정말 허기가 져서 헛것이 보이는지 안개속의 소나무 숲이 어질어질 쓰러지기 일보 직전 주위를 둘러보니 신선의 경치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작가 배병우가 잘 찍은 소나무 그대로였다. 다시 힘이 났다. 그 길 끝 남원 육모정 근처에 ‘비부정’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혼자 산채비빔밥과 막걸리를 시켰는데 안주인이 넉넉한 웃음으로 직접 짠 거라며 주는 참기름이 정말 고소했다. 지리산엔 시인들이 많이 산다. 남원에는 복효근 시인이 살고, 구례에는 박두규, 이원규 시인이, 하동 악양에는 박남준 시인이 산다.

 

흐흐흐흐 흐흐흐흐

그러니까 나를 비웃는다 여겼다

손아귀의 힘이 풀리고

한 움큼 캐던 쑥이 후들거리며

땅에 떨어졌던 모양이데

거기 주저앉아 처량해졌던가 보데

누군가는 이렇게 들었다지

 

세상의 무거운 짐 다 벗어버리라고

홀딱 벗고 너도 벗고

홀딱 벗고 나도 벗고

한 스님께 물어보았지

빡빡 깎고 빡빡 깎고

연암이 열하를 건너며 그러했겠다

새 한 마리 우는 소리 마음에 따라 돌다니

지천명의 나이 쉰, 이제 내 귀에 어찌 들리려나

흐흐흐흐 검은등뻐꾸기

- 박남준「, 그때 검은등뻐꾸기가」부분

 

검은등뻐꾸기를 소재로 한 시는 복효근 시인에게도 있는데 두 시의 공통점이 이 새의 울음소리를 ‘마음에 따라’ 듣는다는 것이다. 두 시인 다 ‘홀딱 벗고’라고 듣는 것을 보면, 남자들의 마음은 죄다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하여튼, 이렇게 그윽하던 지리산길이 ‘1박2일’ 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온 뒤부터 시장바닥이 되었다. 더구나 올해는 구제역 등 가축전염병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므로 청정지역인 그 곳에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을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어디로 떠날까 궁리를 한다. 내가 사는 곳이 광주니까 내장산이 떠오른다. 내장·백암산은 ‘애기단풍’이라 해서 단풍잎의 크기가 자잘하니 아주 예쁘다. 하지만 사람과 차량의 인파를 감안하면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선택한 곳이 강천산이다. 전북 순창군에 있는 강천산은 호남의 금강이라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서울 경기 충청 경상 등 전국에서 찾아오는 명산이 되었다. 등산로가 평탄하고 아기자기하게 잘 가꾸어진 것도 인기를 끄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강천산 단풍을 보면서 잠시 시를 생각한다. 나는 내 시가 주목받지 못한다고 판단하는 중이다. 그래서 각종 지원금과 문학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한다. 지원금이라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서울문화재단 시집 발간지원금 등이 있는데 서너 차례 응모했다가 떨어진 뒤로 요즘은 응모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도 매년 지원자가 발표될 때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 인사들은 지원금과 문학상을 함께 수혜하기도 하는데, 심지어 수 천 만원이라는 거금을 챙긴 사람도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차라리 이런 제도가 없었으면 상대적 박탈감이라도 덜하지 않을까 하다가, 어차피 써야할 돈, 애초 취지대로 공정한 심사가 이루어진다면 가난한 시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역시 ‘공정한’ 심사가 문제다. 중앙의 권력에 줄 대기를 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고, 시를 이렇게 돈으로 계산한다는 것이 내내 찝찝하다. 도대체 내 시는 어느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일까

 

 

비단헝겊인가 했더니 햇살이었다

 

어쩌면 저리 아름다운 무늬일까 했더니

오색단풍이었다

 

사라진 종소리를 찾아 헤매다가 시장으로 가서 국밥에 막걸리 두어 잔

걸치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계곡물이 마르는 오후

 

그림자의 긴 혀가 다가와 손등을 핥았다

 


징그러워라!

 

적막이 종을 들어 나뭇가지에 걸어두자 모과와 감이 텅텅 울렸다

 

산등성이 힘들게 기어올라 산마루에 이르니 키 작은 나무로 허공을 연주

하는 악사들의 저녁,

 

시린 물소리가 계곡을 타고 내려오자 소리의 볼이 빛났다

 - 졸시,「 비얌」부분

 

 담양엔 병풍산이 있다. 병풍산은 평지에 있으면서도 822m나 되는 꽤험준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어 하루 코스로 만만치 않은데 ‘만남재~성암야영장’ 중간에 수북한 단풍터널이 존재한다. 그 아름다운 그늘에서 나는 돌아갈 길 잃어버린 뱀처럼 외로워졌다.

 

 겨울

 

겨울은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다. 춥고 미끄러워서 질색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겨울 여행을 참 좋아한다. 눈 내리는 바다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내가 이렇게 겨울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향이 변산반도라는 것과도 연관이 있으리라. 사람들은 올겨울이 유난히 춥다고 말하는데 나의 유년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눈과 추위가 있었다. 그런 날 바다에 나가면 파도가 깨물어 뱉어놓은 거품이 얼어있었다. 짜디짠 염분을 포함한 바다도 물인지라 바삭바삭 얼어붙은 해변을 걸어 머리카락 흰 할아버지가 김 팔러온다. 한 장 한 장 돌에 붙여 김 만들어내는 동안 갈대들의 마른 노래. 동네 인근 상가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린다. 놀음판이 벌어져 “오살놈! 씨부랄놈!” 욕이 난무하는데 그럴 즈음이면 겨울도 막바지에 다다르는 것 이어서 설 명절을 하루 앞둔 그믐날 저녁 퍼붓기 시작하는 눈발을 보면서 “아따 참말로 섣달 큰애기 개밥 퍼주드끼 퍼붓네이”라고 중얼거린다. 시나브로 눈도 그치고 바다로 가는 길이 열릴 때쯤 도로 절개지의 벌건 황토가 드러난다.

 

울 어머니 매년 사진관에 다녀오신다

그곳에서 아버지 늙어가시니

어머니 미간의 지층을 뜯어내면

지척지간 아버지 주름이다

굵은 연필이라면 머리카락 몇 올 아버지 살쩍에 옮겨

늙은 목탄 풍으로 바꾸는 게 어렵지 않다지

그때마다 깃 넓은 신사복은 찡그리면서

아버지, 어머니 그림자처럼 늙으신다

하, 두 분은 인중 닮은 이복남매 같기도 하고

오누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고민은 할미의 얼굴로

어떻게 젊은 남편을 만나느냐는 것이지만

하, 이별의 눈과 입도 한 사십 년쯤 되면

다정다감하거나

닳아버리고

걱정하면서도

설렌다.

라고 되묻는 식솔들이 생겨나나보다


집이 생긴 별의 식솔들도 따라오나보다

- 송재학,「 죽은 사람도 늙어간다」전문

 

세한삼동이 지나면 분홍색 하늘이 열린다. 봄을 알리는 것은 내소사의 종소리이다. 아침저녁 예불하는 범종소리를 들으면서 변산바람꽃이 핀다. 이젠 만날 수 없는 풍경들과 함께 고향에 대한 생각도 늙는다.


고성만 시인

* 1998년《동서문학》등단.

* 시집『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