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評·컬럼(column)

내가 남긴 먼지는 내가 털어낸다 / 최주식

시인 최주식 2013. 11. 7. 23:38


내가 남긴 먼지는 내가 털어낸다 / 최주식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여행길이라 하던가? 지난 10월, 강원도 삼척 임원항 둘레길을 들꽃 향기 맡으며 쉬엄쉬엄 세 시간 가까이 걸었다. 세상 시름 다 잊은 황홀한 만추(晩秋)의 가을 바다에서 삶을 너무 정신없이 살았구나 싶었다. 바다가 뿜어내는 숨을 마시며 영혼을 밝힐 시를 건져올리고, 정겨운 어촌 풍경에서 사랑이 담긴 시를 담아 내겠다고 시심(詩心)을 작동해 보았으나 역시 시 한 편 생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내 곁에 있는 좋은 친구인 최하룡, 지우병, 이정하, 문기환, 정진성, 장성근, 이상재, 전명, 김정순님을 비롯한 일행들이 축복과 긍정과 아름다움을 지닌 진정한 시심의 배경이라 생각하니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나 같은 바보는 빤히 보이는 핑계거리가 동나는 일이 없으니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한다. 때로는 원고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웹 서핑을 하며 시간을 죽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도 열심히 했다고 슬쩍 나를 속인다.

 

바닷가 바위에 쪼그려 앉아 대략 15년전 쯤부터 최근까지 내가 한 일들을 정리하여 보았다. 그 중에서 봉사단체, 문학단체에서 내가 해야 할 일로 착각해 받아들인 반장, 팀장, 부장, 위원장, 회장 같은 상징적인 존재의 이름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고마운 이름이었는가? 많은 텍스트와 이분법을 가진 통증의 이름이었는가? 열정이 냉소를 대체한 영광의 이름이었는가?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지만 숨가쁜 그 이름에 더 이상은 빠지지 않겠노라 하직 인사를 고하며, 바닷바람에 날려 보냈다. 

 

더불어 여러 지면에 발표한 시와 수필, 컬럼에도 진실은 있었는가? 영롱하고 부드러운 사랑은 있었는가? 고통과 기쁨도 있는 그대로 수용했는가 성찰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의문투성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같이 내가 남긴 먼지요, 내게 묻은 때라는 사실이었다, 아니라고 억지 부려본들 무엇할 것인가? 이제 내가 남긴 먼지는 내가 털어내고, 내게 쌓인 때는 내가 깨끗이 닦아내려 한다. 그러라고 가을 산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바다는 눈부시게 푸르지 않는가?

 

시인 중에는 언어의 연금술사라 할 감성 넘치는 고수(高手)가 수두룩하다. 나는 아직 하수(下手)여서 고수라 생각하는 시인의 시를 틈틈히 필사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해야 읽고 배워서 벅찬 환희와 감동이 느껴지는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 사랑은 가도/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과 힐링 포엠(Healing Poem)이라 할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류시화 번역>을 소리 내어 읽으며 필사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1,000편은 채워야겠다는 태산같은 욕심인데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옷깃에 스며드는 바람이 찬 걸 보니 벌써 겨울은 저만치 와 있다. 나도 가을을 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