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낭 -김강호(1960~ ) 향낭 -김강호(1960~ ) 차오른 맑은 향기 쉴 새 없이 퍼내어서 빈자의 주린 가슴 넘치도록 채워 주고 먼 길을 떠나는 성자 온몸이 향낭이었다 지천명 들어서도 콩알만 한 향낭이 없어 한 줌 향기조차 남에게 주지 못한 나는 지천에 흐드러지게 핀 잡초도 못 되었거니 비울 것 다 비워서 더 비..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백련꽃 사설 - 윤금초(1941~ ) 백련꽃 사설 - 윤금초(1941~ ) 얕은 바람에도 연잎은 코끼리 귀 펄럭이제. 연화차 자셔 보셨소? 요걸 보믄 참 기가 맥혀. 너른 접시에 연꽃이 쫙 펴 있제. 마실 땐 씨방에 뜨거운 물 자꾸 끼얹는 거여. 초파일 절에 가서 불상에 물 끼얹대끼. 하나 시켜놓고 열 명도 마시고 그래. 그 향이 엄청..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또다시 새해는 오는가 - 이호우(1912~70) 또다시 새해는 오는가 - 이호우(1912~70) 빼앗겨 쫓기던 그날은 하 그리 간절턴 이 땅 꿈에서도 입술이 뜨겁던 조국의 이름이었다 얼마나 푸른 목숨들이 지기조차 했던가. 강산이 돌아와 이십 년 상잔相殘의 피만 비리고 그 원수는 차라리 풀어도 너와 난 멀어만 가는 아아 이 배리背理의 단..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산동네에 오는 눈 -신경림(1935~ ) 산동네에 오는 눈 -신경림(1935~ )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먼저 온다 깁고 꿰매고 때워 누더기가 된 골목과 누게막과 구멍가게 위에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때로는 슬레이트 지붕 밑을 기웃대고 비닐로 가린 창틀을 서성대며 남 볼세라 사랑놀음에 얼굴도 붉히지만 때와 ..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달래 - 박태일(1954~ ) 달래 - 박태일(1954~ ) 달래는 슬픈 이름 한번 달래나 해보지 달래바위에 피를 찧었던 일은 우리 옛적 이야기 유월부터 구월까지 하양부터 분홍까지 어딜 가나 저뿐인 듯 피어 떠드는 달래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 두 억 년 앞선 때는 바다였다는 고비알타이 소금 호수 천막 가게에서 달래 장..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수산시장에서 -윤중호(1956~2004) 수산시장에서 -윤중호(1956~2004) 오랜 행상으로, 팔과 다리에 신경통이, 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엄니가 몸살을 앓으신다길래 영광굴비나 한 두름 사드릴까 하고 수산시장을 기웃거리다가 “아줌니 이거 어떻게 해요.” 주머니 돈을 꾸깃거리며 묻는 내게 “맛은 참 좋은디 비싸서……..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 박상순(1962~ )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 박상순(1962~ )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보라는 좋겠다. 폭설로 무너져 내릴 듯 눈 속에 가라앉은 지붕들은 좋겠다 폭설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는 다리는 좋겠다. 겨울 강은 좋겠다. 그런 폭설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먼 우주의 별들은 좋겠다. 즐거운 .. 詩가 있는 아침 2014.02.20
아랫도리/문성해 아랫도리 - 문성해(1963~ )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 詩가 있는 아침 2014.01.16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 박상순(1962~ )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 박상순(1962~ )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보라는 좋겠다. 폭설로 무너져 내릴 듯 눈 속에 가라앉은 지붕들은 좋겠다 폭설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는 다리는 좋겠다. 겨울 강은 좋겠다. 그런 폭설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먼 우주의 별들은 좋겠다. 즐거운 .. 詩가 있는 아침 2014.01.16
서책 - 김수영(1921~68) 서책 - 김수영(1921~68)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 이 책에는 신(神)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된다 잠자는 책이여 누구를 향하여 앉아서도 아니 된다 누구를 향하여 열려서도 아니 된다 지구에 묻은 풀잎같이 나에게 묻은 서책의 숙련― 순결과 오점이 모두 그의 상징이 되려 .. 詩가 있는 아침 201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