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최영미 (1961∼ ) 월동준비―최영미 (1961∼ )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인간이 지겨우면서 그리운 밤. 애인을 잡지 못한 늙은 처녀들이 미장원에 앉아 머리를 태운다 지독한 약품냄새를 맡으며 점화되지 못한 욕망. 올해도 그냥 지나가는구나 내 머리에 손댄 남자는 없.. 행복한시읽기 2013.04.06
모래밭에서―이진명 (1955∼ ) 모래밭에서―이진명 (1955∼ )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 행복한시읽기 2013.04.05
그대가 없다면―미겔 에르난데스(1910∼1942) 그대가 없다면―미겔 에르난데스(1910∼1942)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 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 고약한 가시다발일 뿐입니다. 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가득 채우는 그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 내 입술도 없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내 마음은 엉겅.. 행복한시읽기 2013.04.05
여행자―전동균(1962∼) 여행자―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 행복한시읽기 2013.04.05
모기―김형영 (1944∼ ) 모기―김형영 (1944∼ )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 행복한시읽기 2013.04.05
노모(老母)―전연옥 (1961∼ ) 노모(老母)―전연옥 (1961∼ ) 스타킹은 문갑 위에 있다 거 봐라 내 뭐랬니 이게 출근이냐 전쟁이지 내일 모레면 너도 이제 서른인데 다닐 때 안경 벗지 말고 또릿또릿 잘 보고 다녀야 한다 참내, 구둣솔은 네가 들고 있잖니 전철 안에서 또 졸지 말고 건널목에서도 좌우 잘 살피고 다녀라 .. 행복한시읽기 2013.03.31
푸르른 날―서정주 (1915∼2000) 푸르른 날―서정주 (1915∼2000)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 행복한시읽기 2013.03.31
해피―우영창 (1956∼ ) 해피―우영창 (1956∼ ) 해피가 짖는다 왜 네 이름이 해피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한쪽 귀가 짜부라져 해피인지 다리 하나가 절뚝거려 해피인지 해피인 채로 내게 건너와 너는 나의 해피가 되었다 지금도 네 이름이 해피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끔은 무섭도록 네가 보고 싶다 우리에겐 깊은.. 행복한시읽기 2013.03.31
얼어붙은 발―문정희(1947∼ ) 얼어붙은 발―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 행복한시읽기 2013.03.31
네온사인―송승환 (1971∼) 네온사인―송승환 (1971∼) 저무는 태양이 차례로 회전문 통과한 사람들 그림자를 붉은 담장에 드리운다 갓 돋아난 초록 이파리 검게 물들어간다 곧장 침대로 가기 꺼려하는 여인은 포도주의 밤을 오랫동안 마신다 공장 폐수를 따라 하얗고 둥근 달은 강으로 흐른다 언제나 우리 들은 그 .. 행복한시읽기 201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