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과 나 ― 김영태(1936∼2007) 라벨과 나 ― 김영태(1936∼2007) 내 키는 1미터 62센티인데 모리스 라벨의 키는 1미터 52센티 단신(短身)이었다고 합니다 라벨은 가재수염을 길렀습니다 접시, 호리병, 기묘한 찻잔을 수집하기 화장실 한구석 붙박이 나무장 안에 빽빽이 들어찬 향수(香水) 진열 취미도 나와 비슷합니다 손때 .. 행복한시읽기 2013.03.31
방을 보여주다―이정주(1953∼) 방을 보여주다―이정주(1953∼) 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않.. 행복한시읽기 2013.03.31
수화―김기택(1957∼ ) 수화―김기택(1957∼ )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오곤 하였다. 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나는 눈으.. 행복한시읽기 2013.03.31
실없이 가을을―나해철(1956∼ ) 실없이 가을을―나해철(1956∼ )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행복한시읽기 2013.03.30
눈물 소리―이상희 (1960∼ ) 눈물 소리―이상희 (1960∼ ) 오래 울어보자고 몰래 오르던 대여섯 살 적 지붕 새가 낮게 스치고 운동화 고무창이 타도록 뜨겁던 기와, 검은 비탈에 울음 가득한 작은 몸 눕히고 깍지 낀 두 손 배 위에 얹으면 눈 꼬리 홈 따라 미끄러지는 눈물 소리 들렸다 - 울보야, 또 우니? 아무도 놀리지 .. 행복한시읽기 2013.03.29
낙엽―레미 드 구르몽(1859∼1915) 낙엽―레미 드 구르몽(1859∼1915)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 행복한시읽기 2013.03.29
거룩한 식사―황지우(1952∼ ) 거룩한 식사―황지우(1952∼ )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 행복한시읽기 2013.03.29
대구사과― 상희구 (1942∼) 대구사과― 상희구 (1942∼) 인도라는 사과는 최고의 당도에다 씹히는 맛이 하박하박하고 홍옥이라는 사과는 때깔이 뿔꼬 달기는 하지마는 그 맛이 너무 쌔가랍고 국광은 나무로 치마 참나무겉치 열매가 딴딴하고 여문데 첫눈이 니릴 직전꺼정도 은은하게 뿕어 가민서 단맛을 돋꾼다 .. 행복한시읽기 2013.03.29
묵화(墨畵)―김종삼(1921∼1984) 묵화(墨畵)―김종삼(1921∼1984)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몇 줄 안 되는 글로 이렇게 여운이 끝없는 울림이라니! 아마 혼자 사실 터인 할머니는 눈뜨자마자 외양간에 가, 여물통에 여물을 듬뿍 쏟아서.. 행복한시읽기 2013.03.29
새들은―에밀리 디킨슨(1830∼1886) 새들은―에밀리 디킨슨(1830∼1886) 새들은 네 시- 그들의 여명에- 공간처럼 무수한 대낮처럼 무량한 음악을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가 소모한 그 힘을 셀 수가 없었다 마치 시냇물이 하나하나 모여 연못을 늘리듯이 그들의 목격자는 없었다 오직 수수한 근면으로 차려입고 아침을 뒤.. 행복한시읽기 2013.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