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ESSAY] 아이 러브 카레라이스

시인 최주식 2010. 1. 16. 19:15

[ESSAY] 아이 러브 카레라이스

  • 조연경·프리랜서 방송작가

첫사랑 그 남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살피다가
내가 맛있게 카레라이스를 먹는 걸 보고는 안도했다.
사실 카레라이스는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첫 가사실습 메뉴는 카레라이스였다. 카레라이스의 완성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딸기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한다는 게 마치 엄마가 된 듯해서 즐거웠다. 그날 저녁 집에서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걸 복습한다는 차원에서. 그런데 일을 크게 벌린 건 엄마였다.

엄마는 신바람이 나서 우리 딸이 요리한다고 이모들과 외삼촌한테 전화해서 저녁식사 하러 오라고 한 것이다. 드디어 저녁상이 차려지고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내가 만든 첫 음식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까 좌중을 둘러보았다. 첫 숟가락을 뜬 가족 친지의 모습은 한결같이 '아이코 이게 뭐람?'이었다. 카레가루를 더운 물에 미리 잘 개어서 부어야 하는데 나는 그냥 카레가루를 솔솔 뿌린 것이다.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서 상황을 모면할 길을 궁리하고 있는데, 그 순간 가족의 맏딸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엄마의 한마디가 막 불만을 터뜨리려는 식객들을 잠재웠다.

"아 맛있다. 맛있어. 오랜만에 본토의 맛 그대로 먹어 보네."

엄마는 맛있어 못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연방 "아 맛있어"를 연발했고, 식구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별말 없이 카레라이스를 다 먹었다. 막내이모만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했지만 엄마가 레이저처럼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자 "자꾸 먹어 보니 괜찮네"로 바뀌었다. 조카가 요리한다고 먼데서 택시까지 타고 와 혓바닥이 아리게 쓴 카레라이스를 먹고도 말 한마디 못한 이모들과 외삼촌이 떠나자 엄마는 내게 제대로 된 카레라이스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간이 딱 맞는 게 첫 솜씨치고는 아주 좋았어. 카레가루만 잘 갰다면 최고였을 텐데. 다음부터 넌 최고의 카레라이스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어떤 경우라도 딸을 믿어주고 격려해 주는 엄마가 있어서 나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다만 카레라이스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대학시절 만난 첫사랑 그 남자는 가난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시끌시끌한 분식집에서 99원짜리 쫄면이나 통만두를 먹는 것보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야 좋아하는 낭만파라는 걸 너무 빠르게 감지했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학교 근처에 유일한 레스토랑 '멕시코'로 나를 잘 데리고 갔다. 분위기는 딱 내 스타일이었지만 나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가난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보다는 가장 값이 싼 걸 골랐다. 그게 카레라이스였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어느 날은 슬쩍 "아르바이트해서 월급 받았어" "아빠가 어제 용돈을 듬뿍 주셨네"하며 내가 음식값을 지불하겠다는 표현을 우회적으로 해 보았지만 가난하기에 더욱 자존심이 강한 그는 모른 척했다. 나는 그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기처럼 카레라이스가 맛있는 데는 이 지구상에 없을 거야. 스테이크는 정말 형편없어. 겉은 새까맣게 타고 속은 안 익어서 벌건 피가 나온다니까." 다소 과장법을 써 가며 말했다.

첫사랑 그 남자는 다소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살피다가 내가 정말 맛있게 카레라이스를 먹는 걸 보고는 안도했다. 실은 카레라이스는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카레라이스를 먹은 날은 집에 와서 여러 번 양치질을 하고 물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했다. 그래서 식구들은 내가 첫사랑 그 남자와 데이트 한 날을 알아챘다. 집안일을 봐주는 언니는 "에이, 바보. 다른 데 가자고 해"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의 기분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아 줄기차게 카레라이스만 먹었다. 사랑은 그렇게 위대했다.

결혼해서 첫 임신. 남편은 너무 좋아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시 남편이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없어?"였다. 남편은 입덧을 하는 아내를 위해 한밤중에 뛰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덧을 하지 않았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구토증세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거짓말처럼 문득 카레라이스가 먹고 싶었다. 이게 무슨 조화람. 그렇게 싫어한 음식인데. 이게 입덧인가? 내가 카레라이스를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은 영하의 매섭게 추운 날씨였고 그보다 한밤중에 어떻게 카레라이스를 구해 온단 말인가? 그런데 남편은 구해왔다.

"우리 이쁜이 어서 먹어." 남편이 양은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무슨 일인지 갑자기 카레라이스는 다시 지구상에서 제일 싫은 음식이 돼 버렸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먹었다. 남편을 위해서. 옛날의 막내 이모도 생각하면서.

당신보다 더 딸을 사랑하며 당신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쥐어짜서 딸에게 주려했던 어머니의 사랑, 저 멀리 아프리카 북소리처럼 아련하지만 가슴 젖게 했던 첫사랑 그 남자, 그리고 처음 만난 그 눈빛 그 마음 그대로 한결같이 아내를 지켜주는 남편의 사랑. 모두 카레라이스에 녹아 있다. 아이 러브 카레라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