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밥 외 1편 / 이영옥
가난한 지붕처럼 둥근 연잎들이 모여 살았다
해소 기침병이 심해진 그녀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저물녘의 연못 둘레를 걷고 있었다
길은 조용히 등을 내주고 어둠 쪽으로 흘러갔다
그때 연못 가득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구멍 뚫린 흰 뼈를 묻으러 가나 했다
인기척을 거두고 깡마른 빈집이 되나 했다
연못은 기침소리를 파묻고 서서히 말라갔다
연꽃 향기가 추억의 몸 냄새처럼 떠돌고 있을 때
한 무리 억새꽃들이 피어나 바람에 콜록거렸다
이번 生 내내 나를 덜거덕거리게 했던 뼈들은
진흙바닥에 우르르 흩어져 하얗게 빛나는데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마른 연줄기 힘없이 손사래를 쳤다
습윤濕潤한 세월 너머의 저쪽,
코가 뭉개진 낮달이 고무신을 끌고 나와
푸른 연밥을 조용히 뜸들이고 있었다 나는 언제 뼈를 추스르고 환한 꽃송이로 일어설 텐가
그리움은 어른어른 김으로 서려오고
나는 연밥에 뚫린 컴컴한 열쇠구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왕버들 상회 / 이영옥
왕버들의 깊은 그늘에
발을 담그고 늙어가는 구멍가게
예전부터 주인이던 여자는 이제 노파가 되었다
선반을 비추는 형광등의 눈은 침침해졌고
가는귀가 먹어 버린 이 집은 웬만한 기척에는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바람이 왕버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보면
가게의 실제 주인은 나무인지 모른다
내가 어쩌다 가겟집 앞으로 지나갈 때면
노파는 산도과자가 기다린 헝클어진 시간을
정돈하거나 빨랫비누 위에 내려앉은 사각의 고요를 털어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노파는 소리 없이 움직여
연탄가스로 매캐해진 어두컴컴한 가겟방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으로 물갈이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노파가 끓여주는 라면과 신김치조각에
몇 백 년도 더 된 그림자처럼 붙들려 있었다
가끔 유리창에 찍힌 실루엣들은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쩍쩍 벌렸다
왕버들의 그늘은 몇 십 년을 팔아내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집은 더 이상 시간 밖으로 걸어나오지 않았다
누구든 왕버들 상회에 붙들리기 좋은 달밤
세상을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다
시집 <사라진 입들> 2007년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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