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름밤을 끄다 외 2편 / 강미정
가로등 불빛 아래 들깨밭
숭숭 뚫린 깻잎 구멍을 불빛이 막아주고 있다
깻잎이 바람에 흔들리자 불빛은
놀라 펄쩍뛰며 허기의 구멍을 보여준다
허겁지겁 주워먹은 배고픔이
숭숭 뚫어놓은 구멍,
저 배고픈 구멍 속에서 나도
절망을 벼리며
내 문장의 푸른 문맥 위에
핏발 선 붉은 눈을 얹고
슬피 울고 싶었던 날이 있었던 것처럼,
너를 던져보고 싶었던 날이 있었니? 있었니?
짧은 여름밤을 다 갉아먹고 나방이 날아오른다
생의 진창을 튀기며 불빛에 몸을 던지는
나방은 푸른 배고픔을 깻잎 뒤에 슬어놓았다
아직 뚫리지 않은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저 푸르고 줄기찬 문장을 숭숭숭 뚫는
절망도 모르는 우멍한 구멍,
서글퍼라 이 놈의 세상 온통 구멍뿐이네,
들깨밭을 바라보던 아낙이 가로등을 끈다
저 많은 구멍을 막아주고 있던
불빛이 툭, 발길에 채여 넘어진다
끝방 / 강미정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
불꺼진 방 모서리를 지나 어두운 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다시 수많은 어두운 방을 돌고 돌아가 끝방,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어둠을 담았던 쓰레기통을 씻어 말리고
어두운 방을 닦은 걸레가 겹쳐져 널려 있는
그 옆, 고독하고 긴 복도를 닦은
막대걸레가 세워져 조용히 말라가는 그런 방,
난 그 방 앞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간 가만히 내려
무슨 소린가 끊임없이 들리다가도 귀를 갖다대면 고요해지지
문을 열면 환하게 텅빈 방이 되어버리지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
여러 개의 어둔 방 모서리를 돌고 돌아가
맨 끝에야 다다르는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수많은 빈 방 지키며 부르는 노래 간혹간혹 들리는
그 끝방, 가장 많이 아픈 아픔이
가장 많이 기다린 기다림이 산다는 방,
그 방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너무 화안해서
눈을 감고 말아, 눈을 감고 말아
옆 얼굴 / 강미정
고구마 밭에 쪼그리고 앉아 더딘 손길로 고구마 순을 투둑투둑 따내던 하루, 친구와 약속한 영화를 보러가지 못한 나는 하루가 차암 지루하여 날 참 길다 길다, 입이 댓발이나 나와 똬리 열 두 개 걸고도 남을 입 좀 봐라, 서리가 내리기 전 고구마 순을 다 걷어야지, 걷어야지, 지는 햇살 속 서리 인 바람이 굴밤나무 잎을 쓸어낸 가지를 흔들고 가는 게 보였는데, 뉘엿뉘엿 앞산 너머로 넘어가던 해를 주름 진 얼굴에 잠시 붙잡아 놓으시곤, 길게 후욱, 담배연기 뿜어내시며 거, 차암, 해 빨리 식네, 하실 때 붉게 떨리는 서걱임이 굴밤나무 가지 끝에서 인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가슴께서 뿌욱, 가늘게 인 것도 같아 댓발이나 기어 나온 입이 쑥 들어간 내 가슴쪽이 서늘해져,
보이지 않던 허연 귀밑머리 눈 붉게 적시는 저녁, 해 떨어진 뒤 잠시 고왔던 먹구름 한 무더기, 베란다에 서서 같이 쳐다보며 차암 해 빨리 식네, 빨리 식네, 굽어보는 귀밑머리 허연, 당신의 옆얼굴
'♣ 詩그리고詩 > 1,000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루 밑 외 1편 / 허림 (0) | 2010.01.31 |
---|---|
아랫배로 자유를 읽다/ 서안나 (0) | 2010.01.31 |
연밥 외 1편 / 이영옥 (0) | 2010.01.31 |
달랑게 / 이명수 (0) | 2010.01.31 |
염소 / 박성우 (0) | 2010.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