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잠에 대한 보고서 / 김종옥

시인 최주식 2010. 2. 7. 22:11

잠에 대한 보고서 / 김종옥

 

 

  톨게이트 옆에서 콩농사를 짓는 할머니는 도로 정비과에서 유명하다 불빛에 콩이 잠을 못 잔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가로등들을 깨버리기 때 문이다

  '할머니 한 번 더 깨면 경찰에 고발할겁니다 공무집행 방해예요'

  '또 민원이 들어왔어요 사고가 났잖아요 두 명이 다쳤다고요'

  '이것도 다 세금이거든요 자꾸 이러시면 저희들 모가지가 남아나겠어요?'

   전등을 끼우러 간 기사들이 어떤 말을 해도 할머니는

  '그냥 달고 가' 한마디다

 

  할머니가 처음 정비과에 전등을 꺼달라고 간 것이 몇 년 전이다 그때 정비과에서는 황당한 할머니라면서도 노인의 절절한 설명에 며칠 전등을 껐었다 하지만 초행길인 운전자나 급회전에 서툰 사람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사고가 나고 밤새 불을 켜 놓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그날부터 할머니와 정비과 직원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전등을 끼러 가면 할머니는 기사가 딛고선 사다리를 잡아준다

  '잠 안 자고 왜 댕긴다냐? 눈을 두 개나 달고도 못 댕길 길이 불 켜면 보여야?'

  '할머니, 요즘 사람들 밤낮 따로 있나요?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느그들 발소리에 저것들 잠 깨니께 살박살박 다녀, 환한 불빛에 저 놈들 보랫빛눈 깜짝이는 거 보이쟈?'

   기사의 뒤를 좇던 할머니가 소곤거린다

  '세상에 잠 안자고 맺어지는 열매 어디 있다냐?  느그들도 훤하면 잠 안오쟈?'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할머니가 또 전등을 깬다

 

  시집<잠에 대한 보고서> 2009.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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