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시티 / 박지우
위태롭게 소리 위를 걷던 고양이
플러그 뽑힌 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욕설을 물고 왔다
나는 켜켜이 쌓인 빈 상자 속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욕설들을 숨겼다
내 손에는 고양이의 오물이 묻어 있다
-왜 상처가 났니
-늘 배가 고파요, 난 네루다의 물방울 속에 갇힌 은유만을 생각해요
안개 같은 대화 속에서 욕설이 폭죽처럼 터지는 날 골목은 끙끙 앓았다
언젠가 얼굴을 물끄러미 마주 보며
-하루 사이 확 늙어버렸어요 술독에 빠진 욕설을 건지느라요
-아냐 네가 얼마나 멋진데
희끗희끗 흰털이 섞인 고양이를 어루만지니 가슴에 뭉친 멍이 잡혔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네가 할퀸 그 많은 상처들은 어떡하지
-난 배만 부르면 돼요 전쟁과 죽음, 영혼 따윈 나와 상관없어요
거리에 넘쳐나는 소음들로 나는 헛배가 불러요
소리를 먹고 사는 도시는 벨 소리를 타고 전송이 되지요
높은 담장을 뛰어다니느라 다 해진 발바닥을 보여주었다
-네가 마신 어둠을 생각해 봐
나도 리어카에 실어 나른 어둠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
때론 바퀴에 구멍이 나기도 하고 저울에 매달려 어둠은 늘 팔려가지
고양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크레인이 들어 올린 늦은 저녁
고양이는 쇼핑몰에 떠돌아다니는 섬을 사고 싶어 했다
오렌지빛을 띤 섬이면 더 좋다고 했다
-바다를 닮은 구름이 쉬었다가는 나무 밑에 마음 놓고 욕설을 묻고 싶어요
소리로 들끓는 도시를 떠나 살 수 없는 고양이
-배고픈 건 정말 못 참아요 나는 자유를 반납하고 내 배를 채울래요
쓰레기봉투를 물어뜯던 고양이 입에서 왈칵 노숙의 냄새가 올라왔다
<시에티카> 2010. 상반기
'♣ 詩그리고詩 > 1,000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련, 色을 쓰다 / 최재영 (0) | 2010.03.23 |
---|---|
은신처 / 오명선 (0) | 2010.03.23 |
피아노를 켜다 / 강여빈 (0) | 2010.03.23 |
안개의 성분 / 장인수 (0) | 2010.03.23 |
넌 어때? / 이정란 (0) | 2010.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