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에서/김승희
면세점에 들어서면 무언가 가볍다
은은히 가볍다
세금이 가볍다
마음이 가볍다
뼈가 가볍다
세금이 면제된 삶이 있다는 게 은은 가볍다
면세점에 내내 들고 다니던 골중암흑, 우산과 우울을 두고 나온다
내내 들고 다니던 거울과 기억을 두고 나온다
내내 품고 다니던 돌과 십자가를 두고 나온다
나는 왜
한 발자국 가는 데도 세금을 내는 삶뿐이었다,
돈만이 아니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찌 국세청만이랴
사랑이, 계절이, 청춘이, 가족이, 친구가, 직장이, 시대가, 세상이
세금을 샅샅이 부과하고 은연 막대하게 걷어갔다
면세점에 들어가면 무언가 가볍다,
은은 가볍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손을 살짝 놓고
구석방 귀퉁이에서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작곡한 미뉴에트,
오선지 악보 귀퉁이에다 ^^,?,?? 이런 것도 살짝 끄적여놓고서
레오폴트 모차르트, 국세청의 눈을 잠깐 속이는 즐거움,
세금을 살짝 면제 받는 즐거움
면세점에서
무언가 잊은 듯한 은은한 뼈의 가벼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서는 못 들어가요
여권과 비행기 티켓 가지고 오세요!
- <시평> 2010.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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