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 검은 구멍/고진하
수령(樹齡) 300년은 됨 직한 느티나무,
텅텅 튀는 농구공 대여섯 개쯤 들어갈 허리께에 난
저 검은 구멍에
개미들이 들락거린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왕국 하나쯤은 너끈히 건설할 수 있겠지.
다람쥐나 청설모가 한 뼘 꼬리를 낮추고 드나든다면,
동네 텃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제 새끼들을 깔 둥우리를 틀 수도 있겠지.
참외 서리를 하다가 소나기를 만난 꼬마들이
지나가다 보았다면
그 안에 들어가 키득거리며 훔친 참외를 까먹겠지.
주머니가 넉넉지 않은 연인들이 보았다면
오 사랑을 나누기엔 너무 좁아, 투덜대겠지.
딱히 갈데없는 거지나 탁발승이 보았다면
하늘이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며
얼른 기어들겠지.
밤하늘에 외로이 떠 반짝이던 별들이 보았다면
심심하던 차에 숨바꼭질이나 하자며 숨어들겠지.
저 검은 구멍,
오늘 나를 별들과 함께 숨바꼭질하게 하는
그 속에서 새 잎이 피어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파릇파릇 내 상상을 샘솟게 하는 저 구멍,
느티가 늙었다고 구멍마저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고진하 시인
1953년 영월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산문집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부드러움의 힘'. 김달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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