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한국명시

푹 / 최서림

시인 최주식 2011. 1. 16. 14:48

/ 최서림

 

  푹이라는 말의 품은 웅숭깊고도 넓다 둥글어서 뭐든지 부딪히지 않고 놀기에 좋다 묵은지 냄새가 담을 넘어가는 이 말은 시가 알을 슬기에 딱 좋다 뭐든지 푹 익은 것은 시가 되는 법, 항아리 속에서 멸치젓갈이 푹푹 삭고 있는 마을마다 시가 넘실대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다른 손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속을 삭히고 말을 삭히는 솜씨 따라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오는 솜씨 또한 달랐다 청도에 가면 파리 잡는 끈끈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추어탕집이 있다 성미 급한 시간조차 한 숨 푹 자고서 가는 반질반질 닳은 마루가 있는 집, 소금같이 짠 김치 한 종지에 손님이 파리 떼처럼 득시글거린다 울퉁불퉁한 세월 따라 곰삭은 인생, 할머니가 담그는 멸치젓갈의 비결은 그 집 며느리도 모른다 아직 푹 빠질 줄 몰라서이다

 

 

시집 <물금>2010년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