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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막 착륙하는 헬리콥터의 자세로 외 5편 / 김명철

시인 최주식 2011. 1. 16. 15:20

 

 

 

수직으로 막 착륙하는 헬리콥터의 자세로 외 5편 / 김명철

   

  잠자리의 날개로 떠다니던 저녁은 갔습니다

  양손으로 컨테이너 집의 창살을 가만히 잡고 등을 말리던 가을 저녁은 갔습니다

  흩어진 눈알들을 조각조각 기워도 방 안의 전모가 완성되지 않는 나날이었으나

  비가 오는 날에도 날개를 접지 않았습니다

  찢어진 날개로도 너무 가벼워 보랏빛 입술을 향해 떠다니기도 하였으나

 

  잠자리의 날개맥을 닮은 나의 손금 어디쯤에 무거운 여자와 가벼운 아이가 사각의 방 하나를 지어 들어왔을 때

  조금 찢어진 마른 꽃잎을 따라 나의 날개도 반투명이었습니다

  되돌아선 사람의 굽은 등뼈를 세워 그 방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왔을 때

 

  아침마다, 몸이, 젖어

 

  구멍난 구름 틈에서 가느다란 다리와 수만의 눈들이 버둥거렸습니다 젖은 땅에 젖은 날개를 대고 버둥거렸습니다

 

  뒤통수에 붙어 있는 눈이 흙에 파묻히고 돌아가거나 곧장 갈 수 없는 날개맥의 미로에서 여자와 아이를 맞닥뜨리고 바람의 방향이 남서에서 북서로 바뀐다면

  그건 세수를 할 때 없던 배가 갑자기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 그러나 살(煞)이 흩어지려는 징후로 알았습니다

 

  이제는 발뒤꿈치를 차일 때의 자세에서 피할 때의 자세로

  날개와 몸통 사이에서 오래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경계를 걷다보면 선이 지워진 곳에 이를 때가 있다 / 김명철

 

   

  바람 없이 수직으로 내리는 비를 맞고 있다

  그 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저수지를 보고 있다

 

  하얀 비늘로 솟아오르다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물고기를 보고 있다

  물의 저항 없이 허공으로 치솟을 때의 몸과

  허공의 저항을 받으며 낙하하는 그 까마득함의 격차

 

  물 밖으로 나오기 전에

  지느러미로 저항을 다스리던 사람은

  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눈으로 저항과 맞닥뜨리던 사람은

 

  물 안팎의 경계에서

  젖은 몸과 마른 몸을 번갈아가며 슬퍼할 줄 아는 자의 그림자

 

  제방에 벗어둔 신발 한 켤레가 물기를 머금고

  가지런히 가라앉는다

  발을 빼고 뒤돌아보았을 때 남아 있는 빗금친 덩어리 같은

  젖은 몸에 스며드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느끼고 있다

  그 빛을 온전히 반사하는 저수지를 보고 있다

 

   

파종 / 김명철

   

  한낮의 보도블록이나 보면서 걷고 있었다

  바람이나 사람이나 하늘을 볼 마음은 없었다

  유월 말의 눅눅한 햇살에 아스팔트가 흘러내렸다

 

  4차선 차도에는 정적이 흘렀다

  멀리서 구급차 소리 가늘게 들리다가 사라지더니

  귀에서 또 울먹울먹 피리소리가 났다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폐지 실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생활이 나를 윽박질렀으나

  승부를 낼 수 없는 대상이라고 스쳐 생각했다

  누군가 먹다 버린 천도복숭아가 슬리퍼에 밟혔다

 

  고개 숙인 채 힘겹게 수레를 끌던 그가 멈춰서더니

  나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나와 내 생활이 조금 허둥댔다

 

  무게가 뒤쪽으로 쏠린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새까맣게 탄 그가 내 오른편을 뜻밖인 듯 보고 있었다

 

  작은 공원을 가득 채운 만개한 나리꽃들!

  주름진 그의 입과 눈이 와아 벌어지고 있었다

 

  피리소리와

  수레와 노인이 꽃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와 나의 생활이 천도복숭아에 붙어 있는 개미떼 같았다

 

 

 유감(有感) / 김명철

 

  고산문학상 수상 축하 자리에 나답지 않게 오래 앉아 있었다

  늦은 전철 몇 안 남은 빈자리에 앉아

  나답다는 것을 생각하며 김수영의 「죄와 벌」을 읽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신발을 신은 채 길게 다리를 펴 옆으로 늘어지게 앉아 있다가

  내가 늦는다고 말했어 안했어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엄마 술 먹었어?

  휴대전화로 자기 엄마에게 핏대를 올렸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죄를 지은 것일까 생각하며 「죄와 벌」을 덮었다

  김수영의 두들겨 맞는 여편네와 지우산이 떠오르고

  다시 나답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다

 

  앙칼진 목소리에 맞은편 오십대 중년남자의 꾸중과

  여자의 거친 말대꾸와

  말대꾸에 곧바로 이어져 여자의 뺨을 두번째 때리는 남자의 오른손과

  저쪽 칸에서 이쪽으로 옮겨오던 젊은 남자의 만류와

  만류와 함께 오른팔이 꺾이며 거꾸러진 중년남자의 피와

  심하게 기울어지는 차량과

  심하게 기울어지는 사람들과

  심하게 기울어지는 죄와 벌과

  더 심하게 기울어지는 지난여름의 나의 하강과 촛불과 꽃들과

  그리고 소란스러운 하차와

 

  꽃밭의 잡초를 뽑을 때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여리고 약한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났다

  

눈을 베이다 / 김명철

 

  보내지도 못할 편지 한 장 쓰고 인쇄키를 누른다

  프린터에 걸렸던 용지가 억지로 빠져나오면서

  엄지와 검지 사이를 스쳐 벤다

  책갈피에 끼워둔 하얀 꽃잎의 죽음보다 가볍게

 

  가볍게, 너는 자작나무숲으로 떠났지 그곳에는 빛과 어둠이 섞여 있었고 뿌리를 건드려야만 꽃을 보여주는 나무가 살고 있었지 그 나무는 네가 온 이후로 점점 빛을 향했고 네가 꼭대기에 올라 까치발을 할 때면 길을 떠나기도 했었지 그러나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이후로 나무는 꽃을 피우지도 집을 떠나지도 않았지 몸에서 모래나 털어내거나 안개가 심한 오후에는 이파리를 뒤집으며 지평선에 눈을 맞출 뿐이었지 너의 몸처럼 나무도 뼈가 드러날 만큼 창백해졌지

 

 

  구겨진 채 자판 옆에 방치되어 있던 나무

 

  깊은 구김살을 향해 단단히 뿌리를 뻗는 나무

 

  문과 벽과 지붕을 허물며 하늘로 오르는 나무

 

  백지와 눈을 마주친다

  각진 백(白)과 둥근 백(白)과 멍한 백(白)의 한 가운데에서 순백(純白)이 솟아오른다

 

  빨간 장미 한 송이와 너의 보랏빛 입술과 노랑머리와

  초록의 들판과 맞닿은 차가운 하늘

  납작하게 엎드린 푸른 바람과 핑크빛 구두가 쏟아져 나온다

 

   

동천(動天) / 김명철

   

  인도 옆 다 큰 해바라기를 이해할 수 없다 맑은 날에도 먹구름이 몰려오는 날에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오래전, 빙판에 미끄러지는 바퀴소리와 얼어붙는 벌판의 소리에 마음을 짓눌렸는데도 꽃 이파리를 내놓지 않는다 더 오래전, 아내와 아이를 두고 전장에 나간 어린 병사의 벗겨진 발바닥과 전투마의 발굽에 밟혀 한쪽 귀를 잃었는데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뼈도 없고 속도 없다

  고흐가 던진 아홉 개의 빛 조각에 한쪽 눈을 찔리고도 함형수의 아름다운 비명을 듣고도 입을 열지 않는다 비가 내려 어둠이 흐르기 시작한 오후, 낮아지는 하늘을 피해 몸이 기운다

  바깥 소리에 귀를 열지 않는다 경적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차도를 무단횡단하는 꽃 피운 해바라기들의 질주, 대형트럭들도 비틀거리는데 제자리에서 발도 떼지 않는다 자동차의 전조등에 투명한 뼈대를 드러낸 빗줄기가 이파리에 꽂힌다 작은 우산을 아이 쪽으로 기울여 씌운 어린 엄마가 서둘러 해바라기를 스치며 뛰어간다

  해바라기는 발치로 빗물만 쏟아낸다 한쪽 귀와 한쪽 눈이 없는 해바라기가 침묵으로 흔들리는 어금니를 깨문다 해바라기의 속대가 수심으로 가라앉는다 마른 우물에 얼굴을 묻고 지르는 고함소리,

 

  해바라기의 머리 바로 위에서 번개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천둥소리가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