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고요한 균열 / 김명철

시인 최주식 2011. 1. 16. 15:21

고요한 균열 / 김명철

 

  금줄이 대문을 가로지르자

  눈발에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당 후박나무의 잔뼈까지 드러나는 새벽이어서

  부정하거나 정한 것들도 쉬 드나들지 못했다

 

  한 차례 더 늦겨울 폭설이 있었을 뿐 어둠도 가벼움도 바람도 정갈했다 눈 속에 동백이 피었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집터의 무게중심이 대문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집 벽에 굵은 금이 가로로 그리고 세로로도 지나갔다 몇달 만에 집은 붕괴되었다

 

  집 없는 내 이마를 송곳처럼 파고들던 빗줄기와 햇살

  그는 모자도 없이 먼 길을 떠났다

 

  공터의 구석진 오후, 세발자전거의 꺾인 핸들 위로 덩굴풀이 마음대로 발을 얹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거실이었고 마당이었고 드높은 옥상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천 년을 살았다

 

  오늘 아침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금줄을 쳤다 내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시집 <짧게, 카운터펀치> 2010.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