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균열 / 김명철
금줄이 대문을 가로지르자
눈발에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당 후박나무의 잔뼈까지 드러나는 새벽이어서
부정하거나 정한 것들도 쉬 드나들지 못했다
한 차례 더 늦겨울 폭설이 있었을 뿐 어둠도 가벼움도 바람도 정갈했다 눈 속에 동백이 피었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집터의 무게중심이 대문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집 벽에 굵은 금이 가로로 그리고 세로로도 지나갔다 몇달 만에 집은 붕괴되었다
집 없는 내 이마를 송곳처럼 파고들던 빗줄기와 햇살
그는 모자도 없이 먼 길을 떠났다
공터의 구석진 오후, 세발자전거의 꺾인 핸들 위로 덩굴풀이 마음대로 발을 얹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거실이었고 마당이었고 드높은 옥상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천 년을 살았다
오늘 아침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금줄을 쳤다 내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시집 <짧게, 카운터펀치> 2010.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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