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혹은 부록 / 김영식
옥상이 있는 집에 살았다
악다구니와 곱삶은 보리쌀과 버짐 핀 아이들이 젖은 빨래처럼 펄럭거리던,
창고 위에 덤으로 얹힌 집의 부록
학원이며 여고시대는 부록이 많았다
부록이 많은 잡지를 찾아 헤매던 날들 위로 청춘의 덧니 같은 옥상이 있었다 옥상의 가슴에 보름달 같은 구멍을 내고 세고비아, 바람의 현을 켜던 저녁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내 키는 오동나무 옹이처럼 쓸쓸하게 자랐다 마당의 부록 같은 오동잎 파피루스에 내 고독의 자서전을 기록하고 싶었지만 휘이익! 골목 위로 서툰 휘파람을 날리면
슬레이트 표지로 잇댄 지붕과 지붕 사이로 옥상의 사생아들이 섬처럼 아득하게 흘러오곤 했다 가끔씩
방정식 같은 계집애들과 사랑을 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간 계집애들은 “이딴 옥상 따윈 다신 올라오지 않을 거야”라며 주먹을 먹이고 떠나갔다 그럴 때면 옥상의 페이지마다 킬킬대며 별빛들이 쏟아지곤 했는데,
한 번도 본 권(本券)이 되지 못했던
그 많던 부록의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옥상이 있는 집에 오래 살았다
녹슨 덤벨과 거미줄과 도둑고양이가 낡은 목록처럼 펼쳐져 있던,
<애지> 201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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