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사과꽃 램프 / 유미애

시인 최주식 2011. 1. 16. 15:34

사과꽃 램프 / 유미애

 

식탁 위의 사과 한 알 등불처럼 흔들리는 저녁

어머니의 칼이 길을 트자, 종소리가 흩어졌다

 

헛간 뒤 사과밭 묘지, 봄에도 꽃 피지 않는 아버지의 나무

세잔의 열망도 파리스의 영예도 없이 침묵으로 돌아온 자식들

나무 아래 굽은 등 포개며 11월의 바람 소리를 듣는다

 

사막의 외딴집엔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는데

이따금, 거친 두레박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머니의 백학과 오라비의 목검이 부딪히고

어쩌면 검은 목젖을 부풀려온 이 목마름의 근원도

저 속, 말라죽은 아버지의 뿌리인지 몰라

우우우 턱을 쳐올리면 묘지기의 푸른 눈동자에

훅, 연분홍 꽃잎을 새겨 넣는 늙은 나무

겨드랑이의 노랑부리는 아직도

붉은 꽃냄새에 갇혀 울던 옛집 버리고

나귀 등에 오르는 꿈을 꿀까

칼을 물고 올려다본 고목에서 툭, 풋열매가 터졌다

 

식은 저녁 식탁 위, 죽은 꽃이 피운 생비린내

잊었던 사람의 눈빛처럼 뜨거운 램프 하나 덩그렁!

 

 시집<손톱>2010.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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