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 이문숙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러 들어간 사람을 두고도
꽉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질식하건 말건
그러다 숨을 놓기 직전
고철 덩어리 같은 기억을 붙들고서야
아차,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물건이라는 건 마지막이라는 게 없어서
먼지만 활활 털어버리면 또 슬리퍼가 된다
망각의 먼 땅을 털벅거리며 돌아다니고서도
금방 뒤축이 닳아빠진 슬리퍼로 돌아온다
작년 이맘때 어디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발을 충실히 꿰차고
슬리퍼는 또 열심히 끌려 다닐 것이다 저러다가도
슬리퍼는 또 책상 아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처박힌다
기억이 그렇게 시킨다면
케케한 먼지와 어둠을 거느리고
누군가 슬리퍼를 사납게 끌며 또 어두운
복도 저쪽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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