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세월/표천길
무거운짐 다 버리고
두고 갈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마음 하나로 여기에 섰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세월
비릿함이 참 좋다
아, 저기 걸려 있는 것은 내 것인데
웬 놈의 세월이 이리 구겨졌다냐
다림질하면 펴질랑가
그럼 내 인생도 번듯 할랑가
구겨진 세월인데 참 쉽게도 왔구나
세월에 떠밀려온 삶의 발자국 위로
마음이 추워 어매 생각나던 날
가난한 수레바퀴에 밟힌 가슴은
해가 져도 쉽사리 저물지 못한다
차라리
촛불이 방안에 어둠을 물리고 있을 때
밤마다 고민하는
삶의 애증(愛憎) 끝에 서려 있는
안개를 지우러 나는 가자
-------------------------
제목을 보면서 시의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 했는데 본문에 들어 갈수록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개 과정이 초연하고 담담하여 표천길 시인과 같은 또래의 필자는 더없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무거운 짐 다 버리고/두고 갈 것 하나 없는/가난한 마음 하나로 여기에 섰다>에서는 스스로가 주인인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는 "공수래공수거"가 떠오르고 삶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성찰하게 된다. 또한,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세월>을 통해 본 세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가난한 수레바퀴에 밟힌 가슴은/해가 져도 쉽사리 저물지 못한다>는 인생의 무게와 쉽게 보낼 수 없는 추억을 그리고 있어 대중에게 공감과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시는 단순이 <구겨진 세월>로서의 시가 아니라 삶이 담겨 있는 <안으로 곰삭은 참된 세월>의 힘을 듬뿍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구겨진 세월>은 조금이라도 밝은 면을 보고자 하는 삶의 미(美)이며, 마음이 추워 어매가 생각난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이다. 본질과 허상이 뒤바뀌는 황량한 이 시대에 위로받고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싱싱한 시가 있음은 행복이다. (최주식 시인)
'詩評·컬럼(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지랑이/공현혜 (0) | 2012.04.16 |
---|---|
떡갈나무/김재기 (0) | 2012.03.27 |
인간(人間)의 성(城)/류희정 (0) | 2012.03.12 |
시계속의 자유/윤섭 (0) | 2012.03.04 |
상여소리/김정가 (0) | 2012.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