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초록 풀물/공재동

시인 최주식 2012. 6. 10. 22:34

초록 풀물

 

풀밭에서
무심코
풀을 깔고 앉았다.

바지에
배인
초록 풀물

초록 풀물은
풀들의
피다.

빨아도 지지 않는
풀들의
아픔

오늘은
온종일
가슴이 아프다.

―공재동(1949~ )

유재일

바지에 밴 풀물이 풀들의 피라는 생각이 참으로 놀랍다. 무심코 풀을 깔고 앉았다가 바지에 밴 풀물을 보고 누가 이런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그런데 시인은 초록 풀물을 풀들의 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풀들의 아픔에 온종일 가슴 아파한다. 힘없고 약한 것들을 무심코 짓밟은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들의 아픔을 안쓰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가슴에 아프게 와 닿는다.

우리는 사는 동안 무심코 남에게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준다. 나 또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안겨주었으랴.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상대방에겐 가슴에 박히는 돌이 되고, 무심코 밟고 가는 발이 개미에겐 죽음이 되기도 한다. 무심코 한 장난이 어떤 사람에겐 치명적인 폭력이 된다. 요즘 힘없는 친구를 괴롭혀 죽음으로 몰아간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장난으로 한 일"이라고 말한다. 무심코 한 장난과 괴롭힘이 그 친구에겐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되는 걸 정말 몰랐을까.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한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