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어느 거장의 죽음/노향림

시인 최주식 2012. 12. 23. 22:48

어느 거장의 죽음/노향림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노향림(1942~ )

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있다. 연주회장에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시선이 손가락 끝에 머물지 않고 음파(音波)의 출렁임을 따라 연주자의 감정 속으로, 또 그 곡을 작곡한 음악가의 비탄과 환희와 평화의 드라마 속으로 회통(會通)하고 스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내면과 마주한다. 어디선가 날아드는 새들, 아름다운 영감(靈感)의 날개들이다. 그것들이 연미복 속에 둥지를 튼다. 비록 손은 떨리나 예술의 영감은 새의 날카로운 부리가 되어 건반을 찍어 빛을 튀게 만든다. 그 새들이 허공으로 모두 날아갈 때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생애는 마감된다. 새들은 모두 우리의 내면으로 날아온 것이다.

위대한 유산이란 돌을 깎아 새겨놓는 어설픈 업적이 아니다. 영원한 시간을 관통하는 인간 구원의 메시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비로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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