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거장의 죽음/노향림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노향림(1942~ )
위대한 유산이란 돌을 깎아 새겨놓는 어설픈 업적이 아니다. 영원한 시간을 관통하는 인간 구원의 메시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비로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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