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자유?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오네.
점점 차거워지네.
서리가 끼네.
꼬들꼬들 얼어가네.
줄이 비비 꼬이네
툭, 툭, 끊어지네.
아, 이제 전화기에서
뚝 떨어져 자유로운 수화기.
금선이 삐죽 달린 그걸 두고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네.
전화기에서
천 리 만 리 떨어진 곳도
갈 수 있다네.
―황인숙(1958~ )
이 귀엽고 발랄하고 탱글탱글한 언어의 스프링을 얻어 타본다.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온다'면 이제 전화 걸어오는 이가 확연히 줄거나 아예 없어진다는 뜻일 게다. 마침내 '서리가 끼'고 '꼬들꼬들 얼어'간다. 전화 걸어오는 이가 없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모든 관계의 단절이 아닌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녀'는 누구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금선이 삐죽 달린 수화기'를 보면 알 수 있다(실은 금선이 아니라 구리선이다!). 전화기에서 수화기를 잡아 뜯어낸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전화기가 '그녀'의 삶을 감시하고 감금하고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기를 부숴버렸으니 이제 그녀는 자유다. 하지만 다시 전화기는 성능을 바꿔서 그녀의 '천 리 만 리'를 따라잡았다! 이 시는 22년 전(1990년)에 쓰였다. 그녀의 새로운 자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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