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관한 명상
흙과 물이 만나 한 몸으로 빚어낸 몸
해와 달이 지나가고 별 구름에 새긴 세월
잘 닦인 낡은 그릇 하나 식탁 위에 놓여 있다
가슴에 불이 일던 시절인들 없었으랴
함부로 부딪혀 깨지지도 못한 채
숨 막혀 사려 안은 눈물, 붉은 기억 없었으랴
내가 너를 사랑함도 그릇 하나 갖는 일
무형으로 떠돌던 생각과 느낌들이
비로소 몸 가라앉혀 편안하게 잠이 들 듯
모난 것도 한때의 일 둥글게 낮아질 때
잘 익은 달 하나가 거울 속으로 들어오고
한 잔 물 비워낸 자리, 새 울음이 빛난다
―이지엽(1958~ )
두툼한 옷들로 거리가 한층 어둑해졌다. 어둠이 길게 들어앉으며 이런저런 반추(反芻)도 늘었다. 돌아보면 늘 아쉬운 게 많은 나날, 그래서 우린 때때로 겸허해지는 걸까. 늦은 식탁에 초를 켠다. 올해 난 어떤 그릇이었나. 얼마만한 품으로 일과 삶과 사랑을 담아왔나. '너를 사랑함도 그릇 하나 갖는 일'인데, 그릇은 좀 더 키웠는가. '모난 것도 한때의 일'이라지만 둥글게 낮아지며 '낡은 그릇'처럼 편안해지기는 또 얼마나 어려웠던가. '나'라는 그리고 '시(詩)'라는 또 다른 그릇 앞에 마음을 깊이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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