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기억력 / 이정란 나무의 기억력 / 이정란 책장에 온갖 책을 넣고 긴 세월을 함께 지냈다 층층이 올린 짐을 잘 버텨주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책장이 내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그 소리는 깊은 산 속에서 빗소리와 햇빛에 감응하고 절망을 글썽이던 잎과 줄기의 기억에 가 닿게 하였다 결 사이에 압축되어 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떡 / 이은봉 떡 / 이은봉 오늘밤 나, 냅다 떡, 되어 버렸다 떡, 하니 무릎을 치는 순간 한 손에 떡, 시루떡을 들고 입 딱딱 벌려대고 떡떡 떼어먹는 한 사내의 떡진 얼굴 눈망울 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저게 누구지? 떡에 취해 떡 되어 버린 나? 내 속의 또 다른 나? 실은 그도 남이지 남몰래 나와 은근슬쩍 거래를 하며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포도가 신문을 읽다 / 박재희 포도가 신문을 읽다 / 박재희 초여름이면 포도가 서서히 익어간다 농부는 포도에 신문지로 만든 봉지를 씌운다 빼곡이 적힌 기사들 푸릇한 포도송이에게도 철 지난 신문이 배달되었다 세상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시끄러운 사건들이 포도알에 박힌다 푸른 눈알을 반짝여 본다 기름 냄새에 절은 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장천재 동백꽃 외 3편 / 김영남 장천재 동백꽃 외 3편 / 김영남 눈 내려 쌓이니 여기 동백꽃에는 상처가 보인다 띄엄띄엄하고 선명한 그런데 이 상처들은 유정란일까 품고 있으니 금세 부화를 시작한다 상처의 내용과 결과도 다 껍질을 깨고 나온다 거기에서 내 외할아버지가 걸어나온다 보름밤에 끌려나간 외할아버지 맨발의 상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검지의 긍지 / 유안진 검지의 긍지 / 유안진 야훼와 아담의 최초 접촉(시스티나 성당 천정화)을 내게 맡긴 미켈란젤로는, 닿을 듯 말 듯 전광석화의 찰나적 서스펜스로 야훼의 무한 창조력이 나를 통해 아담에게 감전되었음을 보여 주었지 그렇게 인류문명의 전진방향을 지시하는 사명을 나에게만 부여했지 오직 나만이 그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제23회 <소월시 문학상> 대상 수상작 / 크나큰 잠 / 정끝별 제23회 <소월시 문학상> 대상 수상작 크나큰 잠 / 정끝별 한 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 신호등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개만도 못한 / 최종천 개만도 못한 / 최종천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주인은 개를 못 알아보는 경우가 흔하지만 개는 반드시 주인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본래의 이치로는 주인이 개이고, 개가 주인일 것이다 왜 그런가 허면…… 내 주를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은 실제로 주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 최정란 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 최정란 잎 지으랴 꽃 빚으랴 바쁜 나무 봄이 주문한 꽃들의 견적서를 쓰고 잎들의 월간 생산 계획을 짠다 가장 알맞은 순서도에 따라 발주 받은 꽃들을 완성한다 납기에 늦지 않게 꽃들을 싣고 좁은 가지 끝까지 빠짐없이 배달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안으로 굳은 옹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독신녀의 쇼핑 이야기 / 최금진 독신녀의 쇼핑 이야기 / 최금진 남자를 사야겠어 비염을 앓는 남자, 수상한 냄새를 못 맡는 뚱뚱하고 볼품없고 재고품 속에 섞여 있는 남자 딱딱하게 냉동된 그런 남자를 카트에 담아 삼 개월 할부로 사고 싶어 퇴근하고 돌아와 냉동실에서 한 서너 시간 두었다가 꺼내면 영문도 모르고 훌쩍훌쩍 울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
고비라는 이름의 고비 / 김민정 고비라는 이름의 고비 / 김민정 고비에 다녀와 시인 C는 시집 한 권을 썼다 했다 고비에 다녀와 시인 K는 산문집 한 권을 썼다 했다 고비에 안 다녀와 뭣 하나 못 읽는 엄마는 곱이곱이 고비나물이나 더 볶게 더 뜯자나 하시고 고비에 안 다녀와 뭣 하나 못하는 나는 곱이곱이 자린고비나 떠올리다 시방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