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안국동울음상점 / 장이지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 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가르쳐 주겠지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게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 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하며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아닌지 어떤지 걱정을 하게 되리
밤이 깊도록 나는 눈물차를 이백처럼 마시리 내가 등신대의 눈물방울이 되는 철없는 망상에 빠져.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리 내일의 일용할 울음을 걱정하며 내가 일어서려 하면 고양이 군은 '엇갈리는 유성들과도 같은 사랑'을 짐짓 건넬지도 모르리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론도 형식의 화상이 은은히 퍼지는.
지갑은 텅 비었지만 울음을 손에 쥐고 고양이 군에게 뒷모습을 들키면서, 보석비가 내리는 차원의 문을 거슬러 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와야겠지 비가 내린다면 맞아야 하리 비의 벽 저편 어렴풋 내 울음을 듣는 내 귀가 아닌 내 귀의 허상을 응시하면서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하리.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 장이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12월 바람, 눈은 내리는데,
푹푹 쌓이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할아버지 혼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아버지, 수북한 털가죽에
손을 찔러 넣고 체념하지 못한 꿈을 노래하는데,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날생선을 뜯으며
세상은 머리까지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꼬대를 하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고양이, 강아지, 수한무,
개그맨, 회사원, 꽃집 아가씨, 약국 아저씨, 농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두꺼비, 탐정, 손자놈, 전경 아우들,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은 흥청흥청,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월,
너구리 가죽 가득 별똥별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 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 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의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왁자지껄, 수한무를 찾는 숨이 넘어가는 만담,
모두가 즐거운 한때, 눈은 쌓이는데,
두런두런 유년을 찾아가는데, 종종 미끄러지는데,
청어를 굽는데, 날치 알을 먹으며 깔깔대는데,
하얀 눈은 아랫마을 재우고는 재 너머 공동묘지에도 내리는데,
썩은 굴참나무 그림자에 빠져 죽은 수상한 허물들 위에도 내리는데,
누군가 죽은 친척 이야길 꺼내 시무룩해졌다는,
다시 만월(滿月)의 잔이 도는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중 「어떤 갠날」도 좋고,
음정 박자 무시한 「한 오백 년」도 좋은데, 엉덩이춤을 추는데,
정부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마저 없이
너구리 가족끼리 따뜻한데,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에도 눈은 시간처럼 쌓이는데,
작은 혁명의 밤이 하얗게, 하얗게 지워지는데,
바람의 말을 자꾸 헛들어도 좋은,
너구리 말로도 그대로 좋은 너구리 저택의 밤.
하얀 눈 위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
그리고
천 년만큼 깊이 내려간 쓸쓸함, 눈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꽃게처럼 안아 줘 / 장이지
「안아 달라고 말해 봐.」
「안아 줘.」*
투명한 빌딩 유리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고
컴퓨터만 살찌우는 직장이 싫어져서
옆에선 에스트라공 구두를 벗어 볼까 시늉한다
가자, 노을이 빌딩 안에 밥상을 차렸다
꽃게탕안의꽃게꽃게안의꽃게알
주황색 잘 익은 꽃게알 안에서
우리는 연극 배우랄 수도 있어서
날마다 고도를 기다린다
가자, '삶'아진 알에서 깨어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퇴장인지 퇴근인지
세파(世波) 거품 안에서 서로 헤어진다
라이트를 켠 갑주어 주둥이로 들어갔다가
다음 막을 알리는 태양의 페이드 인
갑주어 똥구멍으로 나와 횡보(橫步) 횡보
으으 , 가자,
컴퓨터 앞에 앉아 넥타이로 하는
교수형 놀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
조명이 하얀 사무실 안에서
해결사 놈을 기다리다 보면
놈은 오지 않고 옆에선 럭키 부장이
'생각'씩이나 해 본다
투명한 빌딩 유리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
살갗을 뒤덮어 가는 골갑 특유의 촉감
집게발은 누구를 죽이고 싶다
혹은 상처를 입힐(을)까 봐 슬프다
안아 달라고 말해 봐
안아 줘 꽃게처럼
집게발이엉킨다
절실한너무나꽃게다운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 중
용문객잔 / 장이지
국경의 남쪽, 사막의 한가운데 용문객잔이 있다고
사막 바깥의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막의 대상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는 곳,
용문객잔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방랑자들이 모래폭풍을 피해 들어와 해진 감발을 푸는 곳,
용문객잔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양고기와 만두와 모주, 도망자들의 왁자지껄,
상인들의 흥청망청, 짐꾼들의 향수가 두런거리는 곳,
용문객잔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진짜 용문객잔일까?
그것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대사막에 바람이 일고
달과 나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요
용문객잔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막의 밤은 유난히 깊고 춥고 허전합니다
사구 저편 어딘가에 별똥별이 떨어졌다고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를 만날 것이고
모르페우스의 유사(流砂) 주머니 속에서
장미의 꿈을 꿀 것이라고
자칼의 긴 울부짖음이 알려주었습니다
거기서 자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바람이 불고 동편으로부터 미명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대상들은 낙타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용문객잔이 황금빛 침묵 위로 투명하게 세워졌습니다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그림자도 없이,
거기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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