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빗자루 이력서 / 이기인

시인 최주식 2011. 11. 4. 21:32

빗자루 이력서 / 이기인

 

지붕 아래로 염려(念慮)의 고드름이 떨어진 날이기도 하다

어떤 염려는 빈방에서 새까만 밤을 지새우고도 마당으로 나와 있다

빗자루는 한평생을 박애주의자로 살아오면서

어두운 집의 벽에 기대어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마당으로 나와서

한 박애주의자의 정신을 땅바닥이 파이도록 써 보았다

빗자루는 한평생을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끌어 모으며 무릎을 꿇어왔다

그는 닳은 빗자루 끝이 간신히 쓸어 모은

오돌토돌한 돌멩이들이 한 가족처럼 어울리는 것을 보았다

사금(砂金)처럼 빛나는 이야기가 비좁은 마당에서

빗자루 끝에서 씌어지는 것을 보았다

지난해 기침소리와 함께 회사로부터 해고통지를 받고 쫓겨나온 이는

얼마 전에 새끼줄처럼 기다란 이력서를 써봤다

아파트 경비원이 되고 싶어서 꾹꾹

눌러쓴 이력서를 꼬르륵 꼬르륵 배고픈 편지봉투 속에 넣어두었었다

혹시나 그의 이력에 구김이나 생기지 않을까,

이력서를 넣은 봉투를 책갈피 속에 아득히 묻어두었었다

그는 이력서가 든 책을 베고서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빗자루가 말끔히 쓸어낸 마당은 빗자루의 새 이력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의례적으로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듯이 빗자루를 집의 벽에 기대어놓았다

마당에 뿌리를 내릴 것 같은 오래된 빗자루 줄기를 걸쳐놓은 집은 커 보였다

그의 조용한 집으로 이사(移徙)중인 구름과 아침 새들이 잠시 날아들었다

새들 중에는 동맥이 끊어질 듯 아프게 지저귀다 소리없이 포드득 포드득 날아간 새들도 있다

무릎이 다 닳은 빗자루는 그의 육친(肉親)처럼

가벼운 몸을 딱딱한 벽 쪽으로 하여 늘 임시로 누워 있는 듯하였다

누군가의 기다란 이력서를 염려의 마음으로 읽어나가고 있을 때

붉은 눈망울로 울먹이던 햇살이 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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