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녀의 쇼핑 이야기/최금진
남자를 사야겠어
비염을 앓는 남자, 수상한 냄새를 못 맡는
뚱뚱하고 볼품없고 재고품 속에 섞여있는 남자
딱딱하게 냉동된 그런 남자를 카트에 담아
삼 개월 카드 할부로 사고 싶어
퇴근하고 돌아와
냉동실에서 한 서너 시간 두었다가 꺼내면
영문도 모르고 훌쩍훌쩍 울면서 두리번거리겠지
플라스틱 젖꼭지라도 물려주면 금세
눈알이 녹아내리는 남자
뼈와 살이 흐물흐물 물러지는 남자
헐값에 덤으로도 얻을 수 있는
그 남자 속의 담백한 우울함을 우려내어
이혼하고 입맛을 잃은 우리 엄마에게도 한솥 끓여줘야겠어
안구건조증이 있는 남자,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고
커다란 귀가 잔뜩 늘어진 남자
한 발짝도 제 힘으론 못 걸어나가는 남자
그런 남자를 사야겠어
탁탁 칼로 잘라 맛있게 담아놓고 조금씩 꺼내
고수레 고수레, 동서남북 텅 빈 공간에 나누어주며 먹고 싶어
남자의 열등한 씨를 배는 것도 좋겠지
하루마다, 이틀마다 서둘러 출산을 해서
배고플 때마다 늘 혼자였던 사람들에게 입양시키면
외로움은 얼마나 캄캄한 어둠이었는지
그 남자의 아기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마다
행복은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알게 될까, 손톱이 길고 예쁜 남자
험한 일을 못하고 피둥피둥 게으름이 전 재산인 남자
냉동고 속에서 꽁꽁 얼어붙은 남자
그런 남자를 사야겠어
지겨운,
병신 같은,
뼛국물을 우려내는 일 말고는 도무지 쓸 데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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