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木手와 小說家/김용범

시인 최주식 2012. 12. 23. 22:38

木手와 小說家

밤새 나무를 켜며 쓰라린 대팻밥을 깎아내도 주위는 송판 한 장으로 말라 비틀어진 가난뿐이야. 이 겨울의 一角에서 묵묵히 나무를 깎는 木手와 9평짜리 임대 아파트의 젊은 小說家. 모든 세상의 아이들이 엄마의 빈 젖꼭지를 빨며 바람과 빈 들판을 꿈꿀 때 형, 가난한 이들의 천사는 이미 傷한 날개 한쪽을 이 세상에 버리고 하늘로 떠났어. 밤새 들쥐처럼 형이 긁는 소설이 日用할 양식이 되어 돌아오는 저녁에 오늘 外出에서 형이 버리고 온 短篇 하나의 뼈아픔. 短篇 하나의 슬픔. 형은 또다시 이 겨울의 一角에 전등을 밝히고 뼈에 뼈를 깎으며 뼈의 대팻밥을 만들어내도 녹슨 스팀 소리가 들리는 방 한켠에서 서서히 濕氣를 말리며 시들어가는 제라늄의 눈물을, 하늘로 날아간 천사의 날개 한쪽을 발견할 수는 없었어.

―김용범(1954~  )

글을 '치는' 시대가 아니라 문장을 '깎고' '새기던' 시대가 있었다. 문학에 젊음을 다 바쳐도 좋은, 신화(神話)의 시대였다. 무슨 보상을 바랐으랴. 그저 불멸을 향한 탐구요 개인적 혁명의 수행이었다. 어수룩한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는 도저한 낭만의 강둑을 낡은 오버코트를 구해 걸친 채 걷던 시대였다. 가난한 문학청년을 배반하지 않고 지켜주던 연인도 가끔은 있었다. 목수가 나무를 깎아내듯 영혼의 뼈를 깎는다고 여겼었다. 물론 좋은 소식은 쉽게 오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의 천사'는 이미 날개가 상한 채 돌아가 다시 찾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수천, 수만 명의 '문청(文靑)'들이 정신의 뼈를 벼리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이제는 냉골에서 떨며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산촌의 소읍에도 훌륭한 도서관 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지나간 시대의 절실함, 그 시대의 깨끗한 낭만은 사라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