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낭송 321

나랑 함께 놀래/박노해

나랑 함께 놀래? 박노해 어린 날 나에게 가장 무서운 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아니었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거였네 세 살 많은 영기가 우리 반에 편입한 뒤 동무들을 몰고 다니며 부하로 따르지 않는 나 하고는 누구도 함께 놀지 못하게 한 그 지옥에서 보낸 일 년이었네 동백꽃 핀 등굣길을 혼자 걸으며 울었고 오동잎 날리는 귀갓길을 혼자 걸으며 울었고 텅 빈 집 마루 모퉁이에 홀로 앉아 울었었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기도를 해봐도 동무가 그리워서 사람이 그리워서 책갈피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곤 했었네 5학년이 되던 해 보슬비는 내리는데 자운영꽃이 붉게 핀 논길을 고개 숙여 걸어갈 때 나랑 함께 놀래? 뒤에서 수줍게 웃고 있던 아이 전학 온 민지의 그 말..

나무1-지리산에서/신경림

나무1 -지리산에서/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샘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 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

행복 합송

행 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구포장에서/박정숙

구포(龜浦)장에서 /박정숙 구포장이 서던 날 나는 무수히 짖어대는 개소리를 들었다 방천 둑을 따라 온갖 개들이 나와서 컹컹 하늘을 물어뜻기도 하고 아예 짖는 것을 포기해 버린 놈들도 있었다. 더러는 철망 안에서 수십 마리씩 비좁게 앉아 몸부림을 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쇠줄에 묶여 어디론가 팔려갈 하늘을 향해 앞발을 떡 버티고 이를 드륵드륵 가는 놈들도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갈비뼈에 송곳니를 박거나, 아니면 언젠가 떠나야 할 우리의 靈魂까지 흔들어 놓는 무섭고 당찬 개소리를 들으며 바삐바삐 둑길을 돌아서 가면, 마치 삶의 終點에 온 듯한 現場이 무섭게 눈앞을 가로막는다. 개들은 수십마리씩 옷을 벗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거나 가마솥에 뛰어든 용감한 모습으로 판자 위에 올려져 끝까지 이그러진 하늘을 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