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 / 김경주 나무에게 / 김경주 매미는 우표였다 번지 없는 굴참나무나 은사시나무의 귀퉁이에 붙어살던 한 장 한 장의 우표였다 그가 여름 내내 보내던 울음의 소인을 저 나무들은 다 받아 보았을까 네가 그늘로 한 시절을 섬기는 동안 여름은 가고 뚝뚝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매미는 곁에 잠시 살다간 더운 바람..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폭설, 민박, 편지 2 / 김경주 폭설, 민박, 편지 2 / 김경주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폭설, 민박, 편지 1 / 김경주 폭설, 민박, 편지 1 / 김경주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검은 마리아 / 김신용 검은 마리아 / 김신용 판잣집의, 그 삐걱이는 계단 같은 흉곽을 가진 역 앞, 빈민굴의 그 좁고 어두운 골목 같은 눈빛을 가진 그 골목길을 서성이며, 잠깐 쉬었다 가실래요? 지나가는 남자들의 옷자락을 붙드는, 그 눈웃음에서 거부할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나던, 헐값의 숙박비만 지불하면 누구나 쉽게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마늘 / 김신용 마늘 / 김신용 그는 오늘도 냄새를 풍긴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온갖 쓰레기통을 순례한 거리 청소부처럼, 아니, 방랑자 같은 시큼한 땀냄새를 풍기면서 귀가한다 간혹 코를 싸쥐게도 한다 소주 한 잔에 돼지고기 한 점 된장에 푹 찍은 날은 같은 공기로 숨쉬는 것조차 두렵게 만든다 내 목구멍이나 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등나무 앞에서 / 김신용 등나무 앞에서 / 김신용 집 뒤 공터에는 늙은 등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고요의 그늘 짙게 드리우고, 공터의 주인공처럼 서 있다. 한낮의 게으른 슬리퍼를 찍찍 끌며 그늘을 찾아들면, 몸 비틀어 뻗어올린 넝쿨로 그늘을 짓고 있는 모습이, 일생의 그늘 하나 짓지 못한 사람은 사절, 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陽洞詩篇 2 / 김신용 陽洞詩篇 2 / 김신용 ―뼉다귀집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즐거운 식사 / 조동범 즐거운 식사 / 조동범 그녀는 능숙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뜨거운 물을 붓고 창 밖에 시선을 던진 채 그녀는 건조한 평일 오전을 바라보고 있다 무표정하게 즐거운 식사를 기다리는 삼 분 동안 그녀는 서류뭉치처럼 단단하게 묶인 일상을 떠올린다 흘러내린 스타킹처럼 구름이 흘러가고 편의점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