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 세월이 가면 박인환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8.23
밥그릇에 심은 꽃 / 유홍준 밥그릇에 심은 꽃 / 유홍준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한 포기 얻어 왔다 화분이 없다 이가 빠진 사기밥그릇 하나 꺼냈다 꽃을 심자면 밥그릇 밑에 구멍을 내야지 구멍을 뚫어야지 십자드라이버 망치 콘크리트못 당치도 않는 연장들을 이용해 밥그릇 깨질까 조심 밥그릇 깨질까 조심조심 구멍을 냈다 구멍..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4.14
물끄러미에 대하여 / 이정록 물끄러미에 대하여 / 이정록 모내기를 마친 논두렁에 왜가리가 서있다, 이가 빠진 무논의 잇몸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잡으려다 어린 벼 포기를 짓밟은 것이다 진창에 처박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 때문에 봄 논의 물살이 몸살을 앓는다 물은 저 떨림으로 하늘을 품는다 하늘을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4.14
절벽으로 / 공광규 절벽으로 / 공광규 내가 시시해졌다 부동산, 재테크, 조루증 상담 이런 광고들에 눈이 쏠린다 아찔한 계룡산 능선이나 북한산 바위 절벽 거기 매달려 있는 소나무들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연을 믿다니 나는 분명히 타락했다 이렇게 쉽게 순결이 구겨지다니 절벽에서 내려왔기 때..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4.14
솔잎 / 김지하 솔잎 / 김지하 엄동에도 솔잎은 얼지 않고 나무들은 뿌리만으로 겨울을 견딘다 모두 오염되고 파괴되었어도 생명은 얼지 않고 뿌리에서 오는 힘으로 넉넉히 새봄을 준비한다. 시집<花 開> 실천문학사. 2002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4.14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4.14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3.18
곤충학자 / 박성룡 곤충학자 / 박성룡 나는 어느날 어느 곤충학자 한분의 댁을 방문하였다. 일찍이 '일생을 벌레와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는 이 노학자의 말을 나는 무슨 인생철학처럼 귀담아들으면서 왠일인지 시선은 자꾸만 그 노학자의 서재 西面에 붙어 있는 곤충채집의 액자들로 향하였다. 그 액자들 속에는 갖가..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3.06
살붙이 / 송기원 살붙이 / 송기원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한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둥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7
겨울 버스 / 나해철 겨울 버스 / 나해철 코끝이 어는 승강장에 서면 너처럼 오고 또 너처럼 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족을 모아 고향을 일구고 싶은 아버지의 꿈과 산바위 위에서나 소리쳐 부르는 스무 살 동생의 터질 듯한 가슴과 끝끝내 기다림의 불쏘시개만 넣고 마는 새벽마다의 시 뱃속까지 시원하고 다디단 바..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