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권오삼 이사 /권오삼 개미들이 줄지어 이사를 간다 저마다 뽀얀 알 하나씩 입에 물고 뽈뽈뽈뽈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 한참이나 지켜봐도 이삿짐은 그뿐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컴퓨터, 장롱…… 같은 건 하나도 없다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30
벽지를 바르며 / 고광근 벽지를 바르며 / 고광근 일요일 아침 우리 가족 벽지를 바른다. 돌돌 감긴 벽지를 펼치니 화들짝 피어나는 꽃무늬 새해에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거라던 어머니 이사 대신 누렇게 바래 버린 벽지 위에 새하얀 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우리 가족 서투른 도배는 꽃무늬가 자꾸 어긋나고 쭈글쭈글 오그라들..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30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30
저 물결 하나/나희덕 저 물결 하나 / 나희덕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30
지평선 / 김현승 지평선 / 김현승 이 눈이 끝나는 곳에서 그 마음은 구름이 되고, 이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 뜻은 더 멀리 감돈다. 한 세상 만나던 괴롬과 슬픔도 그 끝에선 하나로 그리움이 되고, 여기선 우람한 기적도 거기선 기러기 소리로 날아간다. 지나가 버린 모든 시간, 잊히지 않는 모든 기억, 나는 그것들을 머..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30
가을 햇볕 / 안도현 가을 햇볕 /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 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30
형제 / 김준태 형제 / 김준태 초등학교 1,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25
멀리서 빈다 / 나태주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시집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25
아랫목 / 고영민 아랫목 / 고영민 한나절 새끼 낳을 곳을 찾아 울어대던 고양이가 잠잠하다 잠잠하다 불을 지피러 아궁이 앞에 앉으니 구들 깊은 곳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가 야옹지다 오늘밤 이 늙은 누대累代의 집은 구들 속 새끼를 밴 채 진통이 심하겠다 불 지피지 마라 불 지피지 마라 냉골에 모로 누워 식구들은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25
나의 라이벌 / 천양희 나의 라이벌 / 천양희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시인은 말하고 산 사람이 더 무섭다고 염장이는 말하네 어렵고 무서운 건 살 때 뿐이지 딱 일주일만 헤엄치고 진흙속에 박혀 죽은 듯이 사는 폐어肺漁처럼 죽을 듯 사는 삶도 있을 것이네 세상을 죽으라 따라다녔으나 세상은 내게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