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속의 강 / 유종인 매듭 속의 강 / 유종인 강가 잔디밭에 앉아 뜨개질하는 여자가 있네 봄을 좀더 촘촘히 엮으려는 바느질처럼 겨울은 바늘에 머릿기름을 묻히듯 잔디밭 여기저기 연초록 코바늘 싹이 꽂히듯 솟아 있네 한 코 한 코 엮어가는 스웨트는 허공이 마음먹고 모여든 털실 앞에 제 빈 몸을 터줬기 때문이네 돌 속..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7
직소폭포 / 안도현 직소폭포 / 안도현 저 속수무책, 속수무책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필시 뒤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누군가의 손이 있지 않고서야 벼랑을 저렇게 뛰어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오 물방울들의 연병장이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소 저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싶은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6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 황지우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시..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춘설 / 유금옥 춘설 / 유금옥 이 고장에서는 눈을 치우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봄도 치우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 요양 온 나는 그리움을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대관령 산비탈 작은 오두막 여기서 내려다보면, 눈 내린 마을이 하얀 도화지 한 장 같습니다 낡은 함석집들의 테두리와 우체국 마당의 자전거가 스케..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시속10Km / 고경숙 시속10Km / 고경숙 피로한 저녁이 신음을 한다 핸들에 몸을 얹고 저속으로 지나는 트럭 대형약국 네온간판이 환하게 불 밝힐 때 마침 라일락 향기 훅-하고 코끝에 흩날릴 때 아코디언 주름처럼 축 늘어진 트럭 덮개가 덜덜거리며 망가진 카세트를 달랠 때 닭띠 여자의 까칠한 음성 “순대사세요 수-운대..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너트로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종점 / 한창옥 종점 / 한창옥 덧난 콧물감기를 앓던 12월은 그렇게 걸어가고 무릎관절 삐걱이듯 1월과 2월 틈새는 여전히 삐걱댄다 호들갑 떨던 단칸방의 얼룩들이 삐걱이고 작은 네모 창밖으로 덜컹덜컹 화양동까지 다니던 면목동버스종점이 무겁다 적막감은 굴절되어 발자국소리만 끌고 왔다 목선이 고왔던 여자..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질항아리 1 / 김금용 질항아리 1 / 김금용 나팔을 불고 싶었어요 푸른 녹 더께로 앉은 내 안의 벽 허물어내고 싶었어요 곰팡이 냄새에 눈 시린 거미들이 끈끈한 타액으로 몸뚱이를 둥글릴 때 난 번데기 안에 숨어서 언젠가 나비가 되는 꿈을 꿨죠 한 백년쯤 거꾸로 지하감옥에 매달려 어둠 속에 박쥐로 살더라도 만 개의 만..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가을 엽서 / 안도현 가을 엽서 / 안도현 가을을 떠나 보내며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4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