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장례식 / 김충규 구름의 장례식 / 김충규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휙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이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황사는 공습 중이다 / 한영숙 황사는 공습 중이다 / 한영숙 - 삼겹살을 구우며 대공습이다 신종 황사먼지를 휴대한 정체 모를 테러범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차별 도시를 폭파하고 있다 뽀글거리는 벚꽃들 독한 파마약 냄새 날리며 올올이 뽑혀지고 있다 가로수마다 폭발물 파편처럼 쏟아진다 한바탕 뒷골목 패싸움이라도 벌였는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조찬(朝餐) / 나희덕 조찬(朝餐) / 나희덕 깃인가 꽃인가 밥인가 저 희디흰 눈은 누구의 허기를 채우려고 내리고 또 내리나 뱃속에 들기도 전에 스러져버릴 양식을, 그러나 손을 펴서 오늘은 받으라 한다 흰 밥을 받고 있는 언 손들 묵튤립 마른 열매들도 꽃봉오리 같은 제 속을 다 비워서 송이송이 고봉밥을 받고 있다 박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모과나무 밑 / 김충규 모과나무 밑 / 김충규 부음이 왔다 뼈를 무너지게 하는 어떤 부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지 않는다 백 년 동안이나 앞으로 백 년이 더 오기 전에 모과나무와 나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먼저 죽으면 모과나무가 가장 먼저 부음을 전해들을 것이다 고양이가 자주 모과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베이비 디자이너 / 양해열 베이비 디자이너 / 양해열 -배아복제1 당신 머릿속에 자궁이 있어요 넌 어디에서 태어났니? 침대 위에서? 보리밭 샛길에서? 자동차 속에서? 아니 시험관에서...... 아이 진부해, 이 자판기는 아기를 팔아요 투입구에 30캐럿 다이아몬드 넣고 스타트버튼을 누르세요 반죽에 소스, 토핑 얹고 피자 한 판 굽..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등대 / 조말선 등대 / 조말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층계참이 없어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나는 나를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창밖으로 바깥이 갇히고 있다 그것은 창이라고 하기보다는 환기구 같은 것이다 환기구 속에서 어둠이 파랗게 다그치고 있다 올라가, 올라가 어서 나는 빙글빙글 돌고 있다 내다 보이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뼈 / 이승하 뼈 / 이승하 화장장 화구 앞에 식구들이 둘러선다 바퀴가 움직여 쇠침대가 나온다 관도 염포도 수의도 사라지고 얼굴도 가슴도 손도 발도 사라지고 없다 아, 몸이 없다 발굴된 미라 같지만 수천 년을 견딘 것이 아니다 한 시간 만에 남은 것이라곤 대칭으로 남은 팔과 다리의 뼈 갈비뼈 아래로 둥그런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1
밥값 / 최승헌 밥값 / 최승헌 밥값을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떠났다 밥의 힘이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들이 황급히 던져두고 간 빈 밥그릇에 잔인한 바람이 떠돌고 있다 오뉴월 뜨거운 하늘에 침이라도 뱉고 싶을 만큼 쓸쓸한 날, 밥을 데워주던 사람들은 제 가슴에 밥을 퍼서 묻었다 구천*에 가서는 익을 대로 익은 밥..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9
파르티잔 고사목 / 김평엽 파르티잔 고사목 / 김평엽 천왕봉 그 높다는 노루막이에 나무 하나, 척후병처럼 슬픔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 확실히 표적이 되어버린 유효사거리 내의 나무 죽음을 통해 만끽하겠다는 얘기인데 실탄 같이 통렬한 마침표가 또 있을까 환장하겠다 죽음에 근접해야 한다는 것 적발된 슬픔을 정면에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9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구석 벽 / 김은정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구석 벽 / 김은정 따글따글한 정오, 해가 해바라기를 바라보고 있다 해만 바라보고 산다는 일, 참으로 허리 아픈 경험이란 것 전생에 뼈저리게 울먹울먹 곪았던 걸까 중천에서 이글거리는 해가 오히려 혼신을 굽혀 자기를 바라보도록 도도하게 핀 해바라기 한 송이의 현재 참으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