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죽순 / 정재록 사르트르 죽순 / 정재록 고향집 대밭에서 따온 죽순을 깐다 껍질을 벗겨낸 자취가 층층이 마디를 이루면서 죽순의 알맹이는 통대를 닮아간다 껍질을 벗은 상아빛 알몸의 죽순을 반으로 가르자 와! 이 칸칸이 살을 지른 마디들 차츰차츰 보폭을 좁혀가다가 소실점으로 사라져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9
잠에 대한 보고서 / 김종옥 잠에 대한 보고서 / 김종옥 톨게이트 옆에서 콩농사를 짓는 할머니는 도로 정비과에서 유명하다 불빛에 콩이 잠을 못 잔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가로등들을 깨버리기 때 문이다 '할머니 한 번 더 깨면 경찰에 고발할겁니다 공무집행 방해예요' '또 민원이 들어왔어요 사고가 났잖아요 두 명이 다쳤다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수인역 / 김종옥 수인역 / 김종옥 문 닫힌 상가들 길게 늘어선 골목이 역사로 가는 길입니다 처마 밑에 개장국 끓이는 냄새가 진을 치고 날마다 싸움이 문을 박차고 나오는 길입니다 쓰레기가 무섬무섬 자라고 콘크리트 벽돌 틈으로 개망초가 하얗게 피어 레일을 감추고 있습니다 개복숭아 꽃이 그 남루를 다 덮던 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솟골 / 유행두 솟골 / 유행두 솟골엔 재수 없이 둘이만 산다 광대뼈 골 높은 서황댁이랑 뻐드렁니도 없어 밥알 녹여먹는 모동댁이랑 앙살스런 과부 이가 서 말이라고 서황댁 흉보는 모동댁 마늘밭 고랑에서 무릎 시리다 푸념하고 모동댁 아들 없다 무시하는 서황댁 박힌 우물 차지하고 파뿌리 다듬는다 솟골에 솥단..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태양의 뒤편 7 / 유행두 태양의 뒤편 7 / 유행두 가난에 물려본 짐승이면 안다 신용불량자는 무섭다는 걸 아버지를 중환자실 비싼 침대에 눕혀놓고 동생은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보내고 꼬박꼬박 이자에 이자가 붙는 사채업자보다 무서운 짐승이다 심장을 물어뜯어 팔딱거리게 하고는 슬픔을 분양해주면서 행복은 카드 무이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밥상 앞에서 / 김영태 밥상 앞에서 / 김영태 묵은 김치 하나 놓고 먹는 아침 밥상 아내가 남의 말 하듯 말한다. 누구는 부모가 남겨 놓은 재산이 많거나 살아서는 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던데 당신은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생각도 없는데 억울하겠네요.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묵은 김치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맨 처음 외 1편 / 신정민 맨 처음 / 신정민 사과는 사과꽃에 앉은 벌의 더듬이가 맨 처음 닿은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바람이 스쳐간 곳, 햇볕이 드나들며 단맛이 돌기 시작한 곳, 맨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곳, 사과는 먼 기찻길에서 들려온 기적소리, 사과의 귀가 맨 처음 열린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익어가는 거야, 씨앗을 품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생업 외 1편 / 김희업 생업 외 1편 / 김희업 그녀가 생업을 꾸린 신전으로 초대했다 어디만큼 왔나, 문득 눈 떠보니 번지점프 하듯 아찔하다 실족하지 않는 비결을 묻자 마치 기둥을 감았다 풀었다 하며, 쇼걸처럼 매일 밤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기둥과의 불륜에 있단다 기둥만 있다면 등나무, 그녀의 생업은 까딱없어 보였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북 / 박완호 북 / 박완호 교무실 한 구석 캐비닛 위 몇 해동안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북채도 없이 홀로 덩그라니 놓여 있는 북, 허공을 쩌렁쩌렁 뒤흔들 커다란 목청을 갖고도 한 번도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르지 못한 새처럼 힘센 소리의 물줄기를 품고도 얼어붙은 폭포처럼 울지 않는 북 가만..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껌 / 김기택 껌 / 김기택 누군가 씹다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